고생(顧生)은 금릉(金陵·지금의 南京) 사람이다. 

그는 다방면으로 재능이 있었지만 집안이 몹시 가난했다. 

게다가 어머니마저 연로했기 때문에 차마 그 슬하를 떠날 수가 없어

날마다 사람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그려주고 약간의 푼돈을 사례비로 받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러다 보니 고생은 나이가 스물다섯이나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집 맞은편에는 본래부터 빈집이 한 채 있었다. 

언제부턴가 노파 한 사람과 젊은 여자 한 명이 그곳에 세 들어 살기 시작했지만 

여자들만 살고 남자가 없는 까닭에 고생은 그 집안 형편에 대해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고생이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다가 우연히 어떤 아가씨가 

어머니 방에서 나오는 광경을 목도했다. 

나이는 대략 열일곱 여덟 살쯤 되었는데, 수려하고 아담한 자태가 세상에 드문 미인이었다. 

그녀는 고생과 마주쳤어도 별로 피하는 기색이 아니었으나 분위기만큼은 매우 단정했다. 

안으로 들어간 고생이 어머니께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애는 맞은편 집 아가씨인데 나한테 가위와 자를 빌리러 왔다. 

조금 아까 말로는 자기 집에도 홀어머니만 계시다고 하더구나. 

이 아가씨는 가난한 집 자식 같지가 않더라. 

왜 아직까지 출가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가 늙어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내일 가서 그 어머니를 만나보고 한번 넌지시 뜻을 비쳐 봐야겠다. 

만약 그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높지만 않다면, 

네가 아가씨 대신 그 어머니를 봉양할 수도 있지 않겠니?”


하는 대답이었다. 


다음날 고생의 어머니는 아가씨 집으로 찾아갔는데, 알고 보니 그녀 어머니는 귀머거리 노파였다.

집안을 들여다보니 이틀 거리 양식조차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무엇을 해서 먹고사는가 했더니 아가씨가 삯바느질을 한다는 것이었다. 

고생의 어머니가 빙빙 에둘러서 두 집안 살림을 합치면 어떻겠느냐는 의사를 비쳤더니, 

노파는 받아들일 듯한 기색으로 돌아앉아 딸과 상의했다. 

아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은 매우 불쾌한 기색이었다. 

고생의 어머니는 하릴없이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가씨의 표정을 자세히 분석하면서 뭔가 알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가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하다고 꺼려서일까? 사람됨이 말수도 적고 웃음도 없더라.

예쁘기는 복사꽃이나 배꽃과 같다만 서릿발처럼 차갑기만 하니, 정말로 이상한 아이야!”


두 모자는 미심쩍어하면서 한바탕 탄식하다가 없었던 일처럼 치부하기로 하였다. 

하루는 고생이 서재의 창가에 앉아 있는데, 어떤 소년이 찾아와서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소년의 생김새는 대단히 아름다웠지만, 기색은 자못 경망스러웠다. 

고생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이웃 마을에 살아요.”


하는 대답이었다. 


그 후부터 소년은 이삼일마다 한 번씩 찾아왔다. 

차츰 친숙해져 서로 농담도 하고 놀려먹는 사이가 되었는데, 

고생이 품에 안고 애무를 해도 소년은 그다지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다 둘은 마침내 사통하기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더욱 친밀하게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다. 

한번은 이웃집 여자가 건너왔는데, 소년이 눈길을 보내며 고생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다.


“이웃집에 사는 아가씨야.”


고생의 대답에 소년이 토를 달았다.


“저렇듯 아름다운 여자가 표정은 왜 그리 무섭지요?”


잠시 후 고생이 안채로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말했다.


“방금 그 아가씨가 오더니 쌀을 좀 꾸어달라고 하면서 

밥을 지은 지가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고 말하더라. 

이 아가씨는 지극한 효녀인데 그토록 가난하다니 얼마나 불쌍하니? 

우리가 약간이나마 도와줘야겠구나.”


고생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쌀 한 말을 지고 그 집으로 찾아가 어머니의 뜻을 전달했다. 

아가씨는 쌀을 받으면서도 전혀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 후로 아가씨는 고생의 집에 왔다가 어머니가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매번 대신해서 의복과 신발을 만들어 주었다. 

또 고생의 집안을 들락날락하며 마치 며느리라도 되는 양 집안일들을 보살폈다. 

고생은 더욱 그녀에게 감격하여 맛있는 음식이 생길 때마다 

반드시 아가씨의 어머니에게 나누어 보냈다. 

아가씨는 그래도 여전히 고맙다는 인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번은 고생 어머니의 음부에 종기가 나 밤낮으로 통증에 시달리며 울부짖게 되었다. 

아가씨는 수시로 찾아와 살펴보면서 상처를 씻고 약을 발라주었다. 

하루에 서너 번씩이나 그런 일이 반복되자 고생의 어머니는 몸 둘 바를 몰라 불안해했지만,

아가씨는 그 더러움에도 전혀 개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아! 내가 어떻게 해야 너 같은 며느리를 얻어 이 늙은 몸이 죽을 때까지 봉양 받을 수 있을거나.”


라고 탄식하고는 슬프게 흐느껴 울었다.

아가씨가 그녀를 위로하면서 말했다.


“아드님이 지극한 효자이시니, 제가 홀어머니를 모시는 것보다 몇백 배나 낫겠지요!”


“이런 잡다한 병수발을 효자라고 어찌해낼 수가 있겠니?

게다가 나는 하루하루 늙어만 갈 뿐이니 언제 병들어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정말 대를 잇지 못할 것 같다는 근심에 마음을 졸이고 있단다.”


고생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아들이 방안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울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낭자에게 진실로 많은 빚을 졌다. 너는 그 은덕 갚을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야.”


고생이 엎드려서 아가씨에게 절을 하자 그녀는,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공경해 주셨지만 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저에게 굳이 고맙다고 인사할 필요가 있으세요?”


하는 반응이었다. 

이때부터 고생은 그녀를 더욱 경애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가씨의 행동거지는 여전히 뻣뻣하기만 했고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아가씨가 고생의 집에 들렀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고생은 대문 밖으로 나가는 여자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생긋 웃음을 지었다. 

고생은 너무나 뜻밖이라 설레는 가슴을 안고 달려나가 그녀의 집까지 쫓아갔다. 

아가씨에게 수작을 걸었더니 그녀도 거절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 즐겁게 교합했다.

일이 다 끝나자 아가씨는 고생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이런 일은 한 번으로 그칠 뿐이에요. 절대로 두 번은 안 됩니다.”


고생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고생이 다시 아가씨와의 밀회를 약속하려 들자, 

그녀는 정색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날마다 고생의 집에 왔다. 

그녀는 고생과 수시로 마주쳤지만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일 뿐이었다.


한번은 그녀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고생에게 물었다.


“날마다 오는 그 소년이 누구지요?”


고생이 그에 관해 이야기했더니, 아가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놈의 행동이나 태도가 제게 무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친밀한 벗이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었던 것이지요. 

그놈에게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또다시 못된 짓을 하면, 놈이 살고 싶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겠다고요.”


그날 저녁나절, 고생은 소년에게 그 말을 전하면서 덧붙여 말했다.


“반드시 조심해. 그 여자에게는 무례하게 굴면 안 돼!”


“실례하면 안 된다는 여자와 당신은 어떻게 사통했지요?”


고생이 그런 일은 없다고 극구 발뺌을 하자, 소년이 다음과 같이 쏘아붙였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이런 외설스러운 이야기가 어떻게 당신 귀에 들어갈 수 있었겠어요?”


고생이 그 말에 아무 대답도 못 하자, 소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말 또한 그 여자에게 전해 주시죠. 

정숙한 척 가장하지 말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들의 일을 동네방네 소문낼 거예요.”


고생은 분노가 치밀어 낯빛이 달라졌고, 그것을 본 소년은 슬며시 물러가고 말았다.


어느 날 밤 고생이 고즈넉이 앉아 있을 때, 아가씨가 문득 찾아오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저와 당신의 연분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 어찌 운명이라 아니하겠습니까!”


고생은 뛸 듯이 기뻐하며 아가씨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때 별안간 짝짝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황망히 몸을 일으켰지만, 소년은 벌써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고생이 놀라서 물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지?”


소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이 정숙한 아가씨를 구경하러 왔을 뿐이에요.”


그는 다시 아가씨를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오늘은 남을 탓하지 못하겠지?”


아가씨는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재빨리 윗도리를 벗어젖혔다.

그러자 가죽 주머니가 하나 나타났는데, 

그녀가 안에서 잡아채듯 꺼낸 것은 바로 한 자 남짓한 날이 새파란 비수였다. 

소년은 그것을 보자 놀라 뒷걸음질 치며 달아났다. 

아가씨는 문밖까지 쫓아나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소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비수를 공중으로 내던지자 ‘캭’ 소리가 나면서 무지개 같은 빛이 길게 뻗치더니,

잠시 후 어떤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생이 얼른 등불을 비췄더니, 바로 머리와 몸통이 따로 떨어져 나간 한 마리의 백여우였다.

고생이 놀라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아가씨가 말했다.


“이놈이 바로 당신의 연동(童)입니다. 저는 본래 놓아줄 생각이었는데, 

제 놈이 굳이 죽겠다고 덤벼드는군요!”


말을 마치자 그녀는 비수를 거둬 다시 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고생이 아가씨를 끌어당기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더니 그녀는,


“이 요물 때문에 흥취가 모두 사그라들었으니 내일 밤을 기다리세요.”


라고 말하고는 문을 열고 그대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저녁 아가씨가 정말로 다시 찾아와 두 사람은 흠뻑 사랑에 도취할 수 있었다. 

고생이 아가씨에게 그런 능력이 어디서 생겨났느냐고 캐묻자,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이는 당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하는 사안이므로 만약 누설되면 당신에게 이로울 것이 없어요.”


고생이 또 그녀에게 서로 시집 장가드는 일을 상의하려고 했더니,


“당신과 잠자리도 같이했고 또 당신을 위해 물 긷고 밥을 지었으니,

제가 당신의 아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이미 부부인데 다시금 시집 장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는 대답이었다.


“당신, 우리 집이 가난한 게 싫어서 그러는 거요?”


“당신은 정말 가난하지요. 그렇다고 저는 부자입니까? 

오늘 밤 당신과 동침한 것은 당신의 가난이 애달파서 그런 거예요.”


헤어질 무렵, 그녀는 고생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런 구차한 행동은 자주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와야 할 때는 제가 알아서 올 테지만, 올 때가 아니라면 당신이 억지를 부려도 소용없어요.”


그 후로도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고생은 매번 그녀를 잡아끌며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아가씨는 번번이 달아나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그를 위해 바느질을 하고 식사를 준비해 주는 것은 다른 집 부인네들과 전혀 다른 바가 없었다.


몇 달이 지난 뒤, 아가씨의 어머니가 죽었다. 

고생은 있는 힘을 다해 장례를 치러주었고, 아가씨는 이때부터 혼자 살게 되었다. 

고생은 그녀가 집안에 혼자 있으므로 마음대로 할 수 있겠다 싶어 담장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여러 번 사람을 불렀지만 

끝내 아무 응답도 들려오지 않아 대문간을 쳐다보았더니, 

원래부터 안쪽에는 빗장도 걸려 있지 않았다. 

고생은 속으로 아가씨가 딴 남자를 만나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밤이 되어 다시 갔을 때도 여전히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 몸에 지니고 있던 패옥을 창문 틈에 올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루가 지났을 때, 고생은 어머니의 처소에서 아가씨와 다시 마주쳤다. 

그가 방에서 물러 나오자, 아가씨도 뒤따라 나오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저를 의심하시나요? 

사람마다 각자 걱정거리가 다른 법이라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그런 경우도 있게 마련이지요. 

인제 와서 당신의 의심을 없애려고 해봐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급한 일이 있어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겠어요.”


무슨 일이냐고 묻는 고생에게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저는 임신한 지가 벌써 여덟 달이나 되었기 때문에 조만간 아이를 낳을 것 같아요. 

저의 신분이 아직 분명치 않은 까닭에 당신을 위해 아이를 낳을 수는 있지만 기를 수는 없습니다. 

몰래 당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유모를 한 명 찾으세요, 

양자를 들였노라 가장하시면서. 절대로 제가 낳았다는 말은 하면 안 됩니다.”


고생이 그러마 허락하고 어머니께 이 사정을 말씀드리자, 그녀는 웃으면서 신기해했다.


“이 아가씨는 정말로 이상하구나! 

며느리로 들인다 할 때는 안 된다고 하더니 도리어 우리 아들과 사통하기를 원하다니 말야!”


그렇지만 어머니는 기쁨에 겨워 아가씨의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면서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다시 달포 가량이 지났다. 

아가씨가 며칠이나 나타나지 않자 어머니는 의구심이 들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대문은 꼭 닫혀 있었고 사방은 썰렁하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린 다음에야 아가씨가 비로소 

헝클어진 머리채에 때가 덕지덕지하게 엉망이 된 얼굴로 안에서 나왔다. 

그녀는 문을 열어 고생의 어머니를 안으로 들이더니 다시 대문에 빗장을 질렀다. 

어머니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자 뜻밖에도 갓난아이가 침상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낳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어머니가 놀라며 물었더니,


“사흘 되었어요.”


하는 대답이었다. 

강보를 들추고 살펴보니 사내아이였는데, 넓은 얼굴에 이마가 시원스러운 잘생긴 아이였다. 

고생의 어머니가 기뻐하면서 물었다.


“네가 이미 나를 위해 손자를 낳아주었다만, 

너는 의지할 데라곤 없는 혈혈단신인데 장차 누구에게 의탁하려는 것이냐?”


“제 구구한 속내를 어머님께 다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밤이 되어 인적이 드물어지면 아이를 안고 가셔도 괜찮아요.”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두 사람 모두 아가씨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밤이 되자 어머니는 그 집으로 건너가 아이를 안고 돌아왔다.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한밤중, 아가씨가 갑자기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가죽 주머니 하나를 들고 웃으면서 말했다.


“저의 큰일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어요.”


고생이 다급하게 무슨 까닭인지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봉양해 준 은덕을 저는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었답니다. 

지난번에 남녀 간의 일을 두고 한번은 괜찮아도 두 번은 안 된다고 말했던 이유도 

남녀 간의 잠자리에서 보은하려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가난해서 아내를 살 돈이 없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 대를 이을 아이를 낳아주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원래는 한 번만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뜻밖에도 달거리가 또다시 나타나더군요. 

그래서 결국 애초의 말을 어기고 다시 당신과 동침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미 당신의 은혜를 갚았고 저의 소원도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었소?”


“원수의 대가리입니다.”


그녀는 주머니를 치켜들어 안을 들여다보게 했는데, 

그 안에는 사람의 머리통 하나가 수염과 머리카락이 서로 뒤엉킨 상태로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깜짝 놀라며 다시 그렇게 된 사정을 캐묻는 고생에게 아가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이전에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도 

사실은 비밀이 지켜지지 않고 누설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일이 다 끝났으니 이야기해도 무방하겠지요. 

저는 절강 사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마(司馬) 벼슬을 지내셨는데 원수의 모함으로 돌아가셨고 

재산마저 죄다 몰수당했지요. 

저는 늙은 어머니를 업고 도망쳐 나와 이름을 감추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삼 년 동안 숨어서 살았습니다. 

즉시 복수하지 못한 까닭은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었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또 태아가 뱃속에서 꿈틀거려 다시 한동안이 지체되었습니다. 

예전에 한밤중에 밖에 나갔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원수의 집과 가는 길을 확실하게 몰라 행여라도 차질을 빚을까 봐 걱정되어 그랬던 거지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대문 밖으로 나서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당부했다.


“제가 낳은 아이를 잘 보살펴주십시오. 

당신은 박복한 데다 수명도 길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가 당신 가문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밤이 깊었으니 늙은 어머님을 깨워 놀라시게 할 수는 없겠지요. 저는 이만 떠나요!”


고생이 쓰라린 심정으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려는 순간, 

아가씨는 번개처럼 몸을 돌려 눈 깜짝할 새 사라져버렸다. 

고생은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탄식하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그는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면서 그 기이함에 탄식할 따름이었다. 


삼 년 후 과연 고생이 죽었다. 

그의 아들은 열여덟 살에 진사가 되었는데, 할머니가 천수를 누릴 때까지 줄곧 봉양했다고 한다.



이사씨는 말한다.

사람은 반드시 집안에 협녀가 있어야만 연동을 두어도 탈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수컷이 당신의 암컷을 좋아해서 넘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 : 연동: 여성처럼 취급하며 데리고 희롱하는 소년. 

연동은 본래 예쁜 아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남색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Posted by 김허니브레드

광서(廣西)에 사는 손자초(孫子楚)는 시문을 잘한다고 명성이 제법 자자한 선비였다. 

그는 나면서부터 손가락이 하나 더 붙은 육손이었는데, 

성격이 고지식하고 말이 어눌했으며, 

누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더라도 언제나 사실이라고 믿는 그런 사람이었다. 

모임이 있을 때 어쩌다 기생이라도 합석하면 그는 항상 멀찌감치 자리를 피하곤 하였다.

어떤 사람이 이런 성격을 알고 일부러 그를 꾀어낸 다음 

기생을 시켜 껴안게 하고 온갖 장난을 다 치게 만들었다. 

손생은 얼굴뿐만 아니라 목덜미까지 벌게지면서 구슬땀을 줄줄 흘렸고,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한바탕 껄껄대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이리하여 모두 그의 바보스러운 행태를 두고 웃음거리로 삼으면서 

이름하여 ‘손바보(孫癡)’라 부르게 되었다. 


같은 지방에 크게 장사를 하는 한 노인이 살았다. 

그의 재산은 제후에 버금갈 정도였고 친척들은 모두 명문 귀족의 후예들이었다.

그에게는 아보(阿寶)라는 이름의 딸이 하나 있었는데 세상에 둘도 없는 미인이었다. 

그 딸을 위해 좋은 배필을 구하려 들자 대갓집 아들들이 다투어 청혼을 위한 예물을 보내왔지만

그 누구도 노인의 성에 차지 않았다. 


그즈음 손생은 상처를 하고 혼자 살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그를 놀리느라고 매파를 아보의 집으로 보내 구혼해 보라고 권유하자,

손생은 자기 주제도 생각하지 않고 정말로 그 말에 따랐다.

노인은 평소 손자초의 명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너무 가난한 점이 불만이었다.

손생이 보낸 중매쟁이 노파는 방안에서 막 바깥으로 나오다가 공교롭게도 아보와 마주쳤다.

아보는 자신에게 청혼하려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고, 

매파는 손자초의 부탁으로 왔노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아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가 만약 곁가지로 난 손가락을 잘라버린다면 그 사람에게 시집가겠어.”


매파가 손생에게 그 이야기를 했더니 그는, 


“어렵지 않은 일이오.”


하고 단언했다. 


매파가 가고 난 뒤 그는 도끼를 가져와 자신의 손가락을 찍었다. 

고통은 심장까지 파고들었고 붉은 피는 샘솟듯 흘러 그는 거의 죽을 뻔하다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며칠이 지나 겨우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매파에게 가서 자기의 손가락을 보여주자, 

그녀는 기겁하여 당장 아보에게 달려가 그 이야기를 전했다. 

아보 또한 그가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리하여 또다시 장난으로 이번에는 그의 바보티를 없애달라는 요구를 내놓았다. 

손생은 그 말을 전해 듣자 자기는 절대 바보가 아니라고 극구 변명했으나 

아보를 만나 그것을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그러면서 돌이켜 생각하니 아보가 꼭 선녀처럼 예쁘다는 보장도 없는데 

왜 그렇게 자신을 높은 자리에 두는지 모르겠다는 의문도 생겨났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가 예전에 아보에 대해 품었던 열망은 순식간에 싸늘히 식어버렸다.


청명절이 돌아왔다. 

그 지역에는 원래 부녀자들이 교외로 나와 노는 풍속이 있었다. 

이날은 또 경박하고 낭만적인 젊은이들이 무리를 지어 여자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자기들끼리 제멋대로 인물평을 하는 날이기도 하였다. 

손생과 같은 문사(文社)에 들어 있는 몇몇 친구도 억지로 그를 끌어내면서

함께 들판에 나가자고 권유했는데, 그중에 어떤 사람이 손생을 놀리며 말했다. 


“자네가 마음에 두고 있는 그 사람을 한번 볼 생각은 없는가?”


손생도 그들이 자기를 놀리고 있는 줄을 알았다.

하지만 아보에게 조롱당했던 일 때문에 그 역시 아보가 도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었으므로 

흔쾌히 사람들을 따라 그녀를 찾아 나섰다. 

먼발치로 어떤 여자가 나무 아래서 쉬고 있는데 한 떼의 불량소년들이 

마치 담장처럼 그녀를 빙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모두 입을 모아 재잘거렸다. 


“저 여자가 분명 아보다.”


그쪽으로 다가가 확인하니, 그녀는 과연 아보였다. 

손생이 찬찬히 뜯어보았더니, 아보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정말로 아름다운 아가씨였다. 

잠시 후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의 숫자가 더욱 늘어나자, 

아보는 벌떡 일어나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둘러서서 아보를 구경하던 사람들은 모두 넋이 나가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그녀의 인물을 품평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다들 미친 듯이 지껄이고 있을 때 오직 손생만이 홀로 아무 말이 없었다.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려다 말고 고개를 돌려보니, 

손생은 여전히 머물던 그 자리에 넋이 나간 채 서 있는 것이었다. 

친구들이 가자고 불러도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모두들 그를 잡아끌면서, 


“자네 혼이 아보를 따라갔는가?”


라고 놀렸지만, 그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평소에도 말수가 적었기 때문에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리하여 어떤 이는 떼밀고 어떤 이는 그를 잡아당기며 왔던 길을 함께 되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오자 그는 곧바로 침상에 드러누워 온종일 일어나지 않았다.

정신을 잃은 모양이 어찌 보면 술에 취한 것도 같았는데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는 않았다.

식구들은 그가 혼을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광야로 나가 초혼제를 지냈지만 역시 아무 효과가 없었다.

그를 두드려 깨우며 억지로 말을 시켰더니 의식이 몽롱한 채 대답한다는 말이, 


“나는 아보의 집에 있다.”


라는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물어보려 했더니, 그는 다시 침묵 속에 빠져들고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식구들은 당황하면서 백방으로 추측했지만, 그가 왜 그러는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애당초 손생은 아보가 자리를 뜨는 것을 보자 차마 그녀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어느 사이엔가 몸이 벌써 그녀를 따라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차츰 그녀에게 다가가 옷고름 사이에 끼어들었는데 그를 책망하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마침내 그는 아보를 따라 집까지 가게 되었고, 

그녀가 앉거나 눕거나를 막론하고 바짝 붙어 있다가 밤만 되면 서로 교합하며 함께 즐거워하였다.

그러는 동안 허기가 져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어떻게 가야 할지 도대체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아보는 매일 밤 어떤 사람과 교접하는 꿈을 꾸었다. 

남자에게 이름을 물어보니,


“나는 손자초요.”


라는 대답이었다.

그녀는 내심 이상하게 여겼지만 이 일을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손생은 자리에 누운 지 사흘째가 되자 기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며 

당장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호흡이 가늘어졌다. 

걱정이 된 식구들은 사람을 시켜 아보의 아버지를 찾아가게 한 다음 

그의 집에서 손생의 혼을 불러가게 해달라고 간곡한 어조로 부탁했다. 

노인은 웃으면서 말했다.


“평소 전혀 내왕이 없었는데 어떻게 혼백을 우리 집에 빠뜨릴 수 있겠는가?”


그래도 손생의 집에서 보낸 사람이 한사코 매달리자, 그는 하는 수 없이 그러라고 허락했다.

무당은 예전에 손자초가 입었던 옷과 사용했던 짚방석을 가지고 아보의 집으로 갔다.

까닭를 들은 아보는 무척이나 놀라더니 무당을 다른 곳에 보내지 않고

곧장 자기 방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손생의 혼을 불러가게 하였다.


무당이 손생의 집 대문 앞에 이르렀을 때, 손생은 벌써 침대 위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완전히 정신이 들게 되자 아보의 방 안에 있던 화장 도구나 경대, 문갑 같은 가구들이 무슨 색깔, 무슨 물건이라고 줄줄이 꿰었는데 사실과 전혀 어긋남이 없었다.

아보는 그 소문을 듣고 더욱 놀라다가 그의 깊은 정에 은근히 감동하고 말았다.

손생은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자 마치 뭔가를 잊어버린 것처럼

자나 깨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기만 하였다.

그는 늘 아보의 모습이 드러나기만 기다리며 한 번만이라도 그녀와 마주치길 희망했다.


욕불절(浴佛節)이 되었다.

손생은 아보가 수월사(水月寺)에 가서 향을 사르며 참배할 것이란 소문을 듣고

그날 아침 일찍부터 길가에서 눈이 빠지게 그녀를 기다렸다.

정오가 훨씬 지나서야 아보가 나타났다.

그녀는 수레의 휘장 안쪽에서 손자초를 보더니 섬섬옥수로 주렴을 걷고 손생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바람에 더욱 마음이 동한 손생이 수레 뒤를 따라가는데,

갑자기 아보가 시녀를 시켜 그의 이름을 알아오게 하였다.

손생은 열정적으로 자신을 소개했고, 그러는 사이 그의 혼은 더욱 요동을 쳤다.

그는 수레가 떠난 다음에야 비로소 귀가했다.


집으로 돌아온 뒤 그는 또다시 병이 나 인사불성이 되더니 

아무것도 먹지 않은 채 꿈속에서 오직 아보의 이름만 불렀다. 

그리고 한편으로 자신의 혼백이 지난번처럼 영험하지 않다고 늘 한탄하였다. 

그의 집에서는 전부터 앵무새를 한 마리 기르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새가 죽는 일이 생겼다. 

어린아이가 침상 곁에서 죽은 앵무새를 갖고 노는 것을 보자 손생은 ‘앵무새로 변할 수만 있으면

날개를 펴고 날아가 아보의 방 안에까지 들어갈 수 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야흐로 그 생각에 골몰해 있을 즈음, 그의 몸은 벌써 앵무새가 되어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날아 곧장 아보의 처소에 다다랐다. 

아보는 앵무새를 보고 좋아라 하며 손으로 낚아채 

발목을 비단 실로 비끄러매고 삼 씨를 먹이로 주었다. 

일순간 새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가씨, 나를 묶지 마세요! 나는 손자초입니다!”


아보는 깜짝 놀라 발목의 결박을 풀었지만, 새는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보가 새에게 말했다.


“당신의 깊은 정은 이미 제 마음속 깊이 아로새겨졌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사람과 앵무새로 서로 다른 운명이 되었으니 어떻게 혼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앵무새가 응수했다.


“당신 곁에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 저는 만족합니다.”


앵무새는 다른 사람이 먹이를 주면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아보가 주면 기꺼이 받아먹었다. 

아보가 앉으면 그녀의 무릎에 올랐고, 누우면 그녀의 침대 옆에 내려앉았다.


이렇게 사흘이 지나는 동안 아보는 한결같이 그를 사랑하고 아껴주었다. 

그리고 몰래 사람을 파견하여 손자초의 동정을 알아보게 했더니, 

그는 뻣뻣하게 굳어 숨이 끊어진 지 벌써 사흘이나 되지만 심장은 아직 식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아보는 다시 그에게 축수하면서 말했다.


“당신이 만약 다시 사람만 될 수 있다면 저는 죽음을 맹세하고 당신을 따르겠어요.”


앵무새는 그 말을 듣고 조잘거렸다.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군요!”


아보가 절대 그렇지 않다고 맹세하자, 

앵무새는 눈을 옆으로 내리깔고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아보가 발에 헝겊을 감는 전족을 하려고 신발을 벗어 침대 아래에 내려놓자, 

앵무새는 별안간 신발 한 짝을 입에 물고 날아가 버렸다.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지만 새는 벌써 멀리 날아간 다음이었다. 

아보가 할멈을 보내 손자초의 동정을 살피게 했더니, 그는 벌써 깨어나 있었다. 

또 손생의 가족들은 앵무새가 비단신을 물고 날아오더니

별안간 땅바닥에 떨어져 죽는 것을 보고 다들 해괴하게 여기던 참이었다. 

손생은 정신이 들자마자 신발부터 찾았다. 

모두 무슨 연유인지 어리둥절하던 차에 아보가 보낸 할멈이 들어와 

손생에게 신발이 있는 곳을 물었다.


“이것은 아보가 내게 준 신표라오. 

당신의 입을 빌려 한마디 전하게 해주시오. 

나는 그녀가 내게 한 금쪽같은 언약을 잊지 못한다고 말이오.”


할멈은 돌아가 손생이 말한 대로 보고했다. 

아보는 더욱 신기하게 여기면서 일부러 시녀를 통해 이런 이야기가 어머니의 귀에 들어가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사실이 정말 그런지 확인한 다음에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의 글재주에 대한 명성은 그다지 나쁘진 않아. 

하지만 사마상여(司馬相如)처럼 가난하단 말이다. 

몇 년을 골라 겨우 이런 사위를 선택한다면 아마도 명문가의 귀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되고 말 거야.”


아보는 신발에 얽힌 이야기를 하면서 절대 다른 곳에는 시집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부모는 그녀의 뜻에 따르기로 하면서 사람을 보내 손생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알렸다.

손생은 소식을 듣게 되자 너무나 기쁜 나머지 병이 순식간에 나아버렸다.

아보의 아버지가 손생을 데릴사위로 들이려고 하자, 딸이 거기에 반대하고 나섰다.


“사위는 장인의 집에 오래 머무르면 안 됩니다. 

하물며 제 낭군 될 사람은 가난하기까지 하니 시간이 흐르면 남들에게 천시당하고 말 거예요. 

저는 이미 그에게 시집가겠다고 작정했으니

초가집에 나물국을 먹고 살아도 달게 견디며 어떤 원망도 하지 않겠습니다.”


이리하여 손생은 아보를 친영(親迎)하여 혼례를 마쳤다. 

그들은 마치 한세상이나 떨어져 있다가 다시 만난 것처럼 상봉을 기뻐했다. 

그때부터 손생의 집안은 아보가 가져온 혼수 덕분에 약간 형편이 나아졌고 

전답도 상당히 늘릴 수가 있었다. 

손생은 독서에만 빠져 있으며 전혀 생계를 꾸려갈 줄 몰랐지만, 

아보는 재산 관리나 증식에 능숙했으므로 집안일을 가지고 손생을 번거롭게 하는 일은 없었다.


삼 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집안은 나날이 부유해졌다. 

어느 날 손생은 당뇨병을 앓다가 갑작스레 죽고 말았다. 

아보는 상심하여 우느라고 눈물이 마를 새가 없었고 심지어는 먹거나 자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달래도 듣지 않더니 급기야는 한밤중을 타서 스스로 목을 매는 일까지 벌어졌다. 

시녀가 발견하고 서둘러 구해 내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그녀는 끝내 음식을 입에 대려 하지 않았다. 

사흘이 지나 문중의 친척들이 모여들어 손자초를 장사 지낼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문득 관 속에서 신음과 아울러 숨 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뚜껑을 열었더니 손생은 이미 되살아나 있었다. 

그는 자기가 살아난 경위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염라대왕을 뵈었더니 내가 생전에 충직하고 성실했다면서 부조(部曹) 일을 맡아보라고 명하시더군. 그런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손부조의 처가 곧 당도할 것 같습니다’라고 아뢰는 거야. 

염라대왕이 귀신의 장부를 훑어보시고 ‘이 사람은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라고 말씀하시자,

그 사람이 또 이렇게 아뢰더구먼. 

‘곡기를 끊은 지 벌써 사흘이나 되었습니다.’ 

그러자 염라대왕이 나를 돌아보면서, 

‘네 처의 절개와 깊은 사랑에 감동했다. 잠시 너를 다시 살려주마’라고 말씀하시더군.

그러더니 마부에게 말을 끌고 오게 하여 나를 돌려보내 주었어.”


그로부터 손생의 몸은 점차로 회복되었다. 

마침 이 해에 대비(大比) 시험이 있었다. 

시험장에 들어가기 얼마 전에 몇 명의 청년이 그를 놀려주려고 

다 함께 어렵고 생경한 문제 일곱 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손생을 조용한 장소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이는 아무개가 관절(關節)로 빼낸 문제들이야. 자네에게만 몰래 알려줌세.”


손생이 그 말을 정말이라고 믿으면서 밤낮으로 머리를 짜내 일곱 편의 글을 짓자, 

사람들은 속으로 다시 한번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그런데 그해의 시험관은 묵은 문제들이 표절의 폐단을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여 

과거에 보통 나오던 문제들은 죄다 치워버리고 모조리 반대로만 문제를 냈다. 

문제지가 돌려진 다음에 보니 일곱 개의 문제 모두가 손생이 준비한 것과 그대로 일치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그는 이 시험의 장원이 되었고, 

그다음 해에는 다시 진사에 급제하여 사림(詞林)을 제수받게 되었다.

황제는 그의 평범하지 않은 내력을 듣더니 친히 그를 불러서 이야기를 들었다.

손생이 하나하나 자세하게 아뢰자 황제는 매우 기뻐하면서 그에게 큰 상을 내렸고,

나중에는 다시 아보를 접견하고 그녀에게도 많은 상을 내렸다.



이사씨는 말한다.

집착이 그렇게 대단한 성격이라면 그의 심지는 반드시 견고할 수밖에 없다. 

그런 까닭에 책을 열심히 읽는 사람은 반드시 시문에 능할 것이고, 

기예의 연마에 매진하는 자라면 반드시 뛰어난 기술을 보유하게 된다. 

실의에 빠져 아무런 성취도 없는 사람은 하나같이 자기가 똑똑하다고 믿는 자들뿐이다.

기생질과 도박에 미쳐 가산을 탕진하는 일 따위야 어찌 사람이 정신 차려 해야 할 노릇이겠는가! 

그렇게 보면 지나친 총명이야말로 진짜 어리석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 손자초의 어떤 면이 바보스럽단 말인가!




(※ 욕불절(浴佛節) : 석가탄신일의 다른 명칭. 

부처가 탄생할 때 용이 향기로운 비를 뿌렸다는 전설에 따라 

사월 초파일의 법회에는 향을 담갔던 물로 불상을 씻는 행사가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친영(親迎) : 혼례 형식의 하나로 신랑이 여자의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오는 일.


부조(部曹) : 중앙 관서의 각 부서 분과에서 일을 맡은 관리. 

여기서는 명부(冥部)의 한 부서에 소속된 관리를 지칭한다. 


대비(大比) : 명·청 시대에는 삼년에 한 번씩 향시(鄕試)를 치렀는데, 이를 대비라고 했다.


관절(關節) : 응시자가 시험관에게 뇌물을 주고 합격을 꾀하는 일. 


사림(詞林) : 한림(翰林)을 말함. 

명초에 한림원(翰林院)을 창건할 때 ‘사림’이라는 편액을 걸었던 까닭에 한림원의 별칭이 됐다.)

Posted by 김허니브레드

마자재(馬子才 順天)는 순천(順天) 사람이다. 

집안이 대대로 국화를 좋아했지만 그의 대에 이르러서는 유별나게 꽃을 사랑했다. 

그는 좋은 품종이 있다는 말만 들으면 반드시 사들여야 직성이 풀렸고, 

때로는 천릿길도 마다치 않고 꽃을 찾아 길을 떠났다.


하루는 금릉(金陵)에서 온 나그네가 그의 집에 투숙했다가 

자기 사촌이 갖고 있는 한두 가지 국화는 북방에 없는 희귀한 품종이라고 말해 주었다. 

마자재는 그 말을 듣자 당장 마음이 동해 곧바로 행장을 꾸린 뒤 나그네를 따라 금릉으로 갔다. 

나그네가 여러모로 힘을 써준 덕분에 마자재는 가까스로 두 모종을 얻을 수가 있었다. 

그는 꽃모종을 보물처럼 깊숙이 간수했다.

귀로에 오른 마자재는 도중에 한 소년과 만나게 되었다. 

소년은 나귀를 타고 어떤 유벽거(油碧車)를 따라가고 있었는데, 

생김새가 준수하고 풍채는 매우 날렵했다. 

마자재는 차츰 그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소년은 자신을,


“성이 도(陶) 씨입니다.”


라고 소개했다. 

그의 언사는 몹시 기품이 있었으며 우아했다. 

더불어 이야기하는 사이, 

소년이 그에게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으므로 마자재는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러자 소년은,


“꽃의 품종에는 나쁜 것이 없어요. 누가 가꾸고 물을 주느냐에 따라 우열이 달라지지요.”


라고 하더니, 이어서 국화 재배법에 관한 나름의 견해를 그에게 들려주었다. 

설명을 듣고 난 마자재는 몹시 기분이 좋아져서 그들의 목적지를 물었다.


“어디로 가는 길이신가?”


“누님이 금릉에 염증을 느끼시는지라 북쪽 어디 적당한 지역을 찾아가 살려고요.”


마자재는 기쁨에 넘쳐 응수했다.


“내가 비록 가난하지만 몇 칸짜리 초가집은 빌려줄 수 있다오. 

누추하고 퇴락했다는 점만 꺼리지 않으시면 번거롭게 다른 곳으로 갈 필요가 없을 것이오.”


도생은 곧 수레 앞으로 달려가 누나와 그 일을 상의했다. 

수레 안에 있던 사람은 주렴을 걷고 도생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이가 스물 남짓한 절세미인이었다. 여자는 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집이 비좁은 것은 아무래도 괜찮다. 하지만 뜰은 꼭 넓어야 해.”


마자재는 도생을 대신하여 그렇다고 대답했고, 결국 그들은 함께 순천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자재의 집 남쪽은 황폐한 채마밭인데 서너 칸짜리 작은 초가가 딸려 있었다. 

도생은 그곳을 보자 대단히 기뻐하며 그 집에 눌러살기로 결정했다. 

그는 날마다 마자재가 사는 북쪽 집으로 건너와서 그를 위해 국화를 돌보았다. 

이미 시들어버린 국화라 하더라도 그가 뿌리를 뽑아 다시 심어주면 되살아나지 않는 꽃이 없었다. 

하지만 도생의 집 살림살이는 대단히 어려워서 

그가 날마다 마자재와 함께 끼니를 넘기는 것이 고작일 뿐, 

그의 집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올라간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마자재의 아내인 여 씨(呂氏) 또한 도생의 누나를 무척이나 좋아해 

수시로 양식을 보내주며 그녀를 보살폈다. 

도생의 누나는 이름이 황영(黃英)으로 이야기를 무척 감칠맛 나게 잘하는 여자였다. 

그녀는 늘 여 씨의 처소로 건너와 함께 바느질하거나 길쌈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도생이 마자재에게 말했다.


“당신네 집은 본래부터 부유하지 못한데 저까지 날마다 밥을 축내며 신세 지고 있으니, 

이 어찌 오래갈 일이겠습니까! 지금 형편을 보고 계획을 하나 세웠습니다. 

앞으로 국화를 가꿔서 팔면 그 또한 생계를 꾸릴 수단이 될 듯하군요.”


마자재는 원래 고고한 성품이었으므로 그 말을 듣자 도생을 몹시 비루하게 여기며 빈정거렸다.


“나는 그대가 풍류를 아는 고결한 선비라서 응당 안빈낙도(安貧樂道)하리라고 생각했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동리(東籬)를 저자로 만들어 국화를 욕보일 참이군 그래.”


도생이 그 말을 듣더니 웃으면서 대꾸했다.


“자기 힘으로 밥을 먹는 것은 탐욕이 아니고, 꽃을 파는 일도 속된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물론 구차하게 부자가 되어선 안 되겠지요. 

하지만 일부러 가난하게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자재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도생은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그때부터 도생은 마자재가 버린 잔챙이 가지라든가 

열등한 종자들을 모두 주워서자기 집으로 가져갔다. 

그러고는 마자재의 집에서 다시는 잠자거나 밥을 먹지 않았고 

일부러 불러야만 어쩌다 한 번씩 들렀다.


얼마 후 국화꽃 피는 계절이 되었다. 

마자재는 도생의 집 문전이 마치 시장바닥처럼 왁자지껄하자

이상하게 여기며 그의 집으로 건너가 보았다. 

문 앞에는 꽃을 사러 온 사람들이 어떤 이는 수레에 싣고 

어떤 이는 어깨에 둘러메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오가고 있었다. 

도생이 파는 꽃은 마자재도 처음 보는 신기한 품종들뿐이었다. 

마자재는 도생의 탐욕에 혐오감이 일어 그와 절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그가 좋은 품종은 몰래 감춰두고 자기 혼자만 키운 것이 한편 얄밉기도 하였으므로

 한바탕 욕설이나 퍼부어 주려고 도생의 집 사립문을 두드렸다.


도생은 문을 열고 나와 마자재를 보자 그의 손을 이끌어 안쪽으로 데려갔다. 

들어가 보니 원래의 황폐했던 정원 백 평은 모두 국화밭이 되어 집터 외에는 빈틈이 없었다. 

또 이미 꽃을 파낸 자리에도 다른 가지를 꽂아 채워놓고 있었다. 

밭고랑 사이에 심어진 국화들은 하나같이 꽃봉오리를 머금고 있었는데 

아름답고 오묘하지 않은 품종이 없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모두 이전에 자기가 뽑아서 내버린 것들이었다. 

도생은 집 안으로 들어가 술과 안주를 내왔고 국화밭 옆에 술자리를 마련하며 말했다.


“저는 가난 때문에 청빈의 지조를 지킬 수가 없었습니다. 

요행으로 날마다 푼돈이 들어와 우리가 함께 흠뻑 취할 정도는 되었어요.”


조금 있으니 방안에서,


“삼랑(三郞)아.”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도생이 대답하고 건너가더니 곧이어 생전 보지도 못한 음식들을 쟁반에 받쳐들고 나왔다.

요리는 매우 훌륭했고 입맛에도 맞았다. 

내친김에 마자재가 도생에게 물었다.


“자네 누님은 왜 아직 시집가지 않으셨는가?”


“아직 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언제인데?”


“마흔세 달 뒤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마자재가 캐물어도 도생은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날 두 사람은 통쾌하게 술을 마시고 취해서야 헤어졌다.


하룻밤이 지난 뒤 마자재가 다시 건너갔더니,

어제 새로 심은 모종이 벌써 한 자 높이로 자라나 있었다.

그는 놀랍고 신기해서 도생에게 그 비법을 가르쳐달라고 졸랐지만,


“이런 능력은 분명 말로 전수할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당신은 꽃을 팔아서 밥을 먹는 것도 아닌데 그 방법을 어디다 쓰시려고요?”


하는 대답을 들었을 뿐이었다. 


다시 며칠이 지나자 꽃을 사려는 사람들로 들썩이던 문간이 어느 정도 조용해졌다.

도생은 국화를 캐내 짚방석으로 잘 싸더니 몇 대의 수레에 나눠 싣고 길을 떠났다.

해가 바뀌고 봄도 거의 절반이나 지나고 나서야 도생은 남방의 진기한 화초를 싣고 돌아왔다.

그는 성안에 들어가 꽃시장을 벌이더니 열흘 만에 모두 팔아치우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국화를 돌보았다.


작년에 도생에게서 꽃을 샀던 사람들은 그 뿌리를 살려두었어도 

이듬해가 되자 모두 열등한 품종으로 변해 버렸으므로 다시 그에게 몰려들어 꽃을 사 갔다.

도생은 이리하여 날로 부자가 되었다. 

일 년 만에 집을 늘려 짓더니 이년 뒤에는 아예 커다랗게 저택을 새로 지었다.

토목 공사를 벌일 때마다 전부 내키는 대로였고 주인과는 한마디 상의하는 일조차 없었다.

점차로 예전의 꽃밭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집들이 대신 들어서게 되자 

다시 담장 밖에 있는 밭을 사들여 사방을 울타리로 두르고 전부 국화를 심었다.

가을이 되자 도생은 다시 꽃을 수레에 싣고 떠났다. 

그러나 이듬해 봄이 다 지난 다음에도 도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즈음 마자재의 아내가 병들어 죽었다. 

마자재는 황영을 후처로 맞아들일 요량으로 다른 사람을 시켜 넌지시 자기 뜻을 비쳤다.

황영은 단지 미소만 짓는 품이 그 말에 동의하는 눈치였으나

도생이 돌아오고 나서 다시 결정하자고만 말할 뿐이었다.


다시 일 년여가 지났지만 도생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황영은 도생이 집에 있던 때와 마찬가지로 하인을 감독하여 국화를 가꿨다.

돈을 버는 것도 다른 장사치들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그녀는 마을 밖에 있는 기름진 밭 스무 마지기를 사들였고 집도 더욱 웅장하게 새로 지었다.


어느 날 갑자기 복건성에서 왔다는 나그네 한 사람이 도생의 편지를 가지고 왔다.

뜯어보니 누나더러 마자재에게 시집가라고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편지를 부친 날짜를 살펴보니 바로 마자재의 아내가 죽던 날이었다.

국화밭에서 술을 마시며 황영의 결혼을 이야기하던 때로부터는

꼭 마흔세 달 만의 일이었으므로 마자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편지를 황영에게 보이면서 물었다.


“혼인 예물은 어디로 보내면 좋겠소?”


황영은 납채를 받지 않겠다고 사양했다.

또 원래 살던 집은 비좁으니 마치 데릴사위가 들어오듯

마자재가 남쪽 집으로 옮겨와 살면 좋겠다는 희망을 내비쳤다.

마자재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고 택일하여 혼례를 올린 다음 황영을 자기 집으로 데려왔다.


황영은 마자재에게 시집온 이후 남쪽 집과의 사이에 벽을 터서 

문을 만들고 날마다 건너가 종들을 감독했다. 

마자재는 아내가 자기보다 부자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황영에게 

남쪽과 북쪽 집의 가계부를 따로 써서 서로 뒤섞이는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항상 당부했다.


하지만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황영은 매번 남쪽 집에서 가져왔으므로 

반년도 못 돼서 손닿는 것은 모두 도 씨 집의 물건이 되었다. 

마자재는 즉각 사람을 시켜 일일이 되돌려보내고 

아울러 다시는 그곳에서 물건을 가져오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했다. 

하지만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아 두 집의 물건들은 또다시 뒤섞이게 되었다. 

가져오면 다시 갖다 놓는 일들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자 마자재도 번거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황영이 웃으면서,


“진중자(陳仲子) 노릇이 귀찮지도 않으세요?”


하고 놀리자, 

마자재는 몹시도 부끄러워 더는 따지지 않고 모든 것을 황영이 하자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황영이 기술자를 불러모으고 건축 자재를 사들여 토목 공사를 크게 일으켜도 그는 막을 수가 없었다.


몇 달이 지나자 누각과 건물들이 연달아 들어서 

아래위 두 집은 마침내 하나로 합쳐졌고 더 이상 경계를 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황영은 마자재의 뜻을 존중하여 대문을 닫아걸고 다시는 국화를 내다 팔지 않았다.

그런데도 씀씀이는 다른 대갓집보다 호사스러웠으므로 마자재는 혼자서 안절부절못하다가 말했다.


“나의 삼십 년 맑은 덕행이 모두 당신 때문에 망가지고 말았소. 

지금 이 세상에 구차하게 살아 숨 쉬고는 있다지만 

마누라 치마폭에 휩싸여 얻어먹고 사는 처지가 되었으니, 

장부의 기개라곤 터럭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지경이구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부자가 되고 싶어하나 나만은 가난하길 원한다오!”


황영이 말했다.


“저는 결코 탐욕스럽거나 치사한 인간이 아닙니다. 

하지만 저라도 웬만큼 넉넉하게 생활하지 않는다면, 

천년 뒤의 사람들은 도연명을 두고 가난한 상놈이라 

백 대가 지난 뒤에도 뜻을 펴지 못했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애오라지 우리 가문의 팽택령(彭澤令)이 

남들에게 조롱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렇다 쳐도 가난한 사람이 부자가 되는 것은 어렵지만 

부자가 가난하게 지내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지요. 

당신이 용돈을 제아무리 마음껏 뿌려도 저는 결코 아까워하지 않겠습니다.”


“남의 돈으로 선심을 쓰는 것이 어째서 대단한 수치가 아니란 말이오?”


마자재의 응수에 황영이 이어서 말했다.


“당신은 부유해지고 싶지 않다지만 저 또한 가난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하는 수 없군요. 당신과 갈라서 사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겠어요. 

고결한 분은 저절로 고결해질 테고 속된 인간은 스스로 속물이 되면 그만이니 

서로 방해될 일이야 없겠지요!”


황영은 정원에 초가를 한 채 짓고 마자재를 입주시킨 다음 

예쁘장한 계집종을 골라 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마자재는 그곳에 기거하게 되면서부터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렇지만 며칠이 지나자 황영이 보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을 시켜 불러도 그녀는 오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직접 갈 수밖에 없었다.

하룻밤 뒤 그는 다시 황영에게 갔고 어느덧 이런 식의 생활이 일상화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황영은 또 웃으면서 말했다.


“동쪽 집에서 밥을 먹고 서쪽 집에서 주무시는 형국이구려. 

청렴한 사람이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을걸요.”


마자재 역시 자기 꼴이 우스웠으므로 아무 대답도 못 하다가 결국은 다시 예전처럼 합쳐 살게 되었다.


나중에 마자재는 일 때문에 금릉에 가게 되었다. 

때마침 국화가 피어나는 가을이었다. 

그는 이른 아침 꽃집 앞을 지나다가 가게 안에 수많은 국화 분이 나열된 광경을 보았는데, 

꽃을 가꾼 솜씨나 꽃송이 모양이 매우 빼어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어쩌면 도생이 키운 꽃 같다는 느낌이 들어 마자재는 꽃집 앞을 서성이며 

누구라도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주인이 나왔는데 과연 도생이 틀림없었다.

마자재는 기쁨에 겨워 헤어진 이후 있었던 일들과 그리웠던 마음을 모두 이야기하고

그날은 도생의 집에서 묵었다. 

마자재가 도생에게 함께 돌아가자고 청하자, 그는 자기 나름의 복안을 설명했다.


“금릉은 제 고향이니 장차 여기서 혼인하고 살랍니다. 

그동안 약간의 돈을 모았으니 우리 누님에게 좀 전해 주시죠. 

연말이 되면 꼭 틈을 내어 잠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마자재는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더욱 고집스럽게 도생을 졸랐다.


“다행히도 집안이 풍족하니 앉아서도 호강할 수 있다네. 

다시 장사해서 돈을 벌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러면서 그는 가게 안에 버티고 앉아 종더러 대신 가격을 매겨 싼값에 팔아치우게 하였다.

물건은 며칠 만에 모두 팔렸다.

마자재는 도생을 재촉하여 행장을 꾸리게 한 다음 배를 빌려 타고 북쪽으로 올라갔다.

집에 도착해 보니 도생의 누나는 벌써 집을 청소하고 침대에 이부자리까지 새로 깔아놓은 모양이

 흡사 동생이 돌아올 줄 미리 알기라도 했던 것 같았다.


도생은 행장을 풀자마자 인부들을 감독하여 정자며 정원을 대대적으로 수리했다.

공사가 마무리되자 그는 날마다 마자재와 더불어 바둑을 두거나 술을 마실 뿐

다른 친구는 도무지 사귀려고 들지 않았다. 

마자재는 도생을 위해 혼인을 주선했지만, 그는 언제나 사양만 하고 응하지 않았다. 

누나는 계집종 둘을 보내 그의 시중을 들게 했는데, 

이렇게 삼사 년이 지나는 사이 딸 하나가 태어났다.


도생은 원래부터 호주가였지만 사람들에게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마자재의 친구인 증생(曾生)도 주량으로 대적할 사람이 없는 사람이었다.

마침 증생이 마자재를 보러 왔기에 그는 증생을 도생에게 소개하고 

더불어 술을 마시며 주량을 비교하게 하였다. 

두 사람은 양껏 술을 마시고 매우 기분이 좋아 서로가 늦게 만난 것을 한탄했다.

아침나절부터 한밤중 사경(四更)에 이를 때까지 마신 술을 계산해 보니 각자가 

백 병을 헤아릴 정도였다. 

증생은 진흙처럼 흐물흐물하게 취해 앉은자리에서 잠들었지만, 

도생은 자기 방에 돌아가 자려고 몸을 일으켰다. 

문을 나서서 국화밭을 지나는 순간 그는 마치 산이 무너지듯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옷가지는 고스란히 곁에 놓인 채였는데, 

도생은 땅바닥에 몸이 닿자마자 곧 사람 키만큼 높이 자란 국화로 변했다.

가지에 달린 십여 송이의 꽃은 모두 큼직큼직해서 사람 주먹보다도 컸다.

마자재가 기절할 듯이 놀라 황영에게 달려가 그 이야기를 전하자,

그녀도 서둘러 달려 나오더니 국화를 뽑아 땅 위에 눕히면서 중얼거렸다.


‘어쩌자고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취했담!’


그녀는 옷으로 국화를 덮고 마자재와 함께 돌아가면서 절대 들여다보아선 안 된다고 당부했다.

날이 밝은 뒤 다시 가서 살폈더니, 도생은 국화 밭머리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

마자재는 그제야 두 남매가 국화의 정령임을 알게 되었고, 

그 후로는 도생과 황영을 더욱 사랑하고 존경했다. 

도생은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뒤부터 더욱 호탕하게 술을 마셔댔다. 

그는 늘 편지를 써서 증생을 불러왔기 때문에 두 사람은 저절로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화조절(花朝節)이 되자 증생이 내방하면서 

두 명의 종을 시켜 약재를 담가 빚은 배갈 한 동이를 짊어지고 왔다.

그는 도생과 마자재를 불러 함께 마시기 시작했는데, 

단지가 거의 비었을 때도 두 사람은 별로 취한 것 같지 않았다.

마자재는 슬쩍 다른 술병을 단지 안에 부어 넣었고, 두 사람은 그것도 모두 마셨다.

증생은 인사불성으로 취했기 때문에 그의 종들이 주인을 업고 집으로 돌아갔고,

도생은 땅바닥에 누워 또다시 국화로 변했다.


마자재는 그 광경을 본 적이 있었으므로 전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고

황영이 그랬던 것처럼 국화를 뽑은 다음 곁에서 그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한참 뒤부터 이파리가 시들시들 마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마자재가 깜짝 놀라 황영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말하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맙소사, 당신이 내 동생을 죽였구려!”


황영은 달려가 국화를 살펴보았지만, 뿌리와 줄기는 벌써 시든 다음이었다. 

그녀는 슬픔에 목이 멘 채 국화의 줄기를 잘라 화분에 심었고 안방으로 가져가 물을 주며 보살폈다.

마자재는 죽고 싶도록 후회하면서 증생을 매우 원망했다.

며칠 뒤 들려온 소문으로는 증생도 그날 너무 취해서 벌써 죽었다는 것이었다.


화분 속의 꽃은 차츰 싹을 틔워 꽃봉오리를 맺더니, 구월이 되자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다.

줄기는 짧고도 튼튼했으며 꽃은 분홍색이었다. 

냄새를 맡아보면 술 향기가 나서 ‘취도(醉陶)’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는데, 

술을 뿌려주면 꽃이 더욱 무성하게 피어났다.

훗날 도생의 딸이 장성하게 되자 벼슬아치의 집으로 시집을 보냈다. 

황영은 늙어 죽을 때까지도 별달리 이상한 행적은 없었다.



이사씨는 말한다.

청산백운인(靑山白雲人)이 결국에는 술에 취해 죽고 말았구나. 

세상 사람들은 모두 그를 두고 안타까워하지만 그 자신만은 스스로 죽음을 통쾌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취도를 정원에 심어두고 매일 바라볼 수만 있다면 마치 좋은 벗을 대한 듯, 

혹은 절세미인과 마주 앉은 듯한 느낌이 들리라. 

이 품종의 국화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지 않을 수 없구나.




(※ 유벽거(油碧車) : 유벽거(油壁車)라고도 한다. 

수레 벽에 기름을 칠해 장식했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옛날 여자들이 타는 수레였다.


동리(東籬) : 국화를 심은 뜨락.


진중자(陳仲子) : 전국 시대 제(齊)나라 사람. 

‘회남자(淮南子)’ 범론훈(氾論訓)에서는 그를 두고 “절개가 곧고 행동은 저항적이었다. 

더러운 임금의 조정에는 들어가지 않고 난세의 음식은 먹지 않다가 마침내 굶어 죽었다

(立節抗行, 不入汚君之朝, 不食亂世之食, 遂餓而死)”라고 설명하고 있으며, 

맹자는 그의 행위가 널리 퍼진다면 사람은 모두 지렁이가 되고 말 거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염결지사(廉潔之士)의 표본 같은 인물이다.


팽택령(彭澤令) : 도연명은 일찍이 팽택현령을 지냈는데, 

황영도 성이 도씨이기 때문에 우리 가문의 팽택령이라고 말한 것이다.


화조절(花朝節) : 음력 이월 십오일은 백화(百花)의 생일이라 하여 화조절이라고 부른다는 기록이

‘몽량록(夢梁錄)’의 ‘이월망(二月望)’에 보인다. 

어떤 책은 이월 십이일, 혹은 이월 이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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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東海)상의 고적도(古迹島)에는 

오색이 찬란한 내동화(耐冬花)란 꽃이 피는데 사철 시들지도 않는다. 

섬에는 원래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고 인적 또한 드문 편이었다.

등주(登州)에 사는 장생(張生)은 원래 호기심이 많은 데다 

노는 것 또한 남에게 뒤질세라 부지런히 쫓아다니는 성격이었다. 

그는 고적도의 경관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자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혼자 쪽배를 타고 그곳으로 건너갔다.


섬에 올라서니 마침 꽃들이 만발하여 몇 리 밖까지 향기가 퍼져나가는 중이었고 

굵기가 십여 아름이나 되는 나무들도 여기저기 우거져 있었다. 

장생은 경관에 취해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다가 

술병을 따 혼자서 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자니 동반자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문득 꽃밭 사이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이 

다홍치마를 눈부시게 펄럭이며 걸어 나오는데 세상에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녀는 장생을 보더니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어쩐지 느낌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저랑 똑같은 취미를 가진 분이 먼저 와 계실 줄은 몰랐네요.”


장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교주(膠州)의 기생입니다. 

조금 전 해공자(海公子)를 따라 이곳에 왔지요. 

그 사람은 좋은 경치를 찾아 여기저기 훨훨 나도는 중이지만 

저는 다리가 아파 잠시 이곳에 눌러앉았던 참이랍니다.”


장생은 외롭고 적적하던 차에 미인과 어울리게 되자 

좋아라 그녀를 끌어앉히고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여인의 말씨는 부드럽고 우아하여 사람의 혼백을 요동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으므로 

장생의 마음은 순식간에 그녀에게 기울어갔다. 

해공자가 나타나면 즐거움도 끝이라는 걱정이 든 그는 여자를 끌어안으며 교합을 요구했다.

여자도 기다렸다는 듯 흔연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두 사람의 흥이 한창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갑자기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초목이 뭔가에 깔려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여자는 황급히 장생을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해공자가 왔어요.”


장생이 엉거주춤 옷차림을 추스르다가 돌아보니 여자는 벌써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어 몸뚱이가 술통보다 굵은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기어 나왔다.

장생은 혼비백산하여 등 뒤의 거목 사이로 몸을 숨기며 뱀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만 바랐다.

하지만 구렁이는 그의 앞쪽 가까이 다가오더니 몸뚱이로 사람과 나무를 몇 바퀴나 친친 동여 감았다. 장생의 두 팔은 그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꼭 끼여버려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뱀이 고개를 위쪽으로 치켜들어 혓바닥으로 장생의 코를 찌르자 코피가 주르륵 아래로 쏟아졌다. 

바닥으로 흐른 피가 웅덩이처럼 고이자 뱀은 대가리를 굽혀 그것을 들이마셨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장생은

문득 허리춤에 찬 염낭 속에 여우 사냥 때 쓰는 독약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는 손가락 두 개를 꼼지락거려 주머니를 간신히 끄집어냈고

바로 봉지를 뜯은 뒤 약가루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또 고개를 손바닥 쪽으로 비튼 뒤 핏방울을 약가루 위에 떨어뜨렸다. 

잠깐 사이 피가 한주먹이나 고이자 뱀은 과연 대가리를 손바닥 쪽으로 옮기고 그 피를 핥아 먹었다. 

하지만 미처 다 마시기도 전에 몸뚱이가 스르륵 풀리더니 

흡사 벼락 때리듯 나무둥치에 꼬리를 휘둘렀다. 

그 충격으로 둥치는 반 동강이나 부러져 나갔고 

뱀은 대들보가 무너지듯 땅바닥에 널브러져 뻗어버렸다.


장생은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노래져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한나절이나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뱀을 배에다 싣고 돌아간 뒤 달포가 넘도록 중병을 앓았다. 

그제사 생각하니 교주의 기생이란 여자도 뱀의 화신이었을 거란 의심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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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산현(長山縣) 출신의 중당(中堂) 유홍훈(劉鴻訓)이 

무관 아무개와 함께 조선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는 안기도(安期島)라는 섬에 신선이 산다는 소문을 듣자 배를 띄워 한번 가보려고 작정했다.

하지만 조선의 대신들은 하나같이 불가함을 말하며

‘꼬마 장(小張)’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원래 안기도는 인간 세상과 두절되어 있다고 하였다. 

오직 신선의 제자인 꼬마 장만이 매년 한두 차례 왕래하기 때문에 

안기도에 가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에게 먼저 아뢰어야 하는데, 

꼬마 장이 좋다고 하면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섬에 즉시 당도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회오리바람이 불어 배를 전복시킨다는 이야기였다.


하루 이틀이 지난 뒤 조선 국왕이 유중당을 접견했다. 

입조하고 보니 어떤 사람이 칼을 차고 종려로 짠 삿갓을 쓰고 단상에 앉아 있는데

나이는 서른 살 남짓으로 풍채며 용모가 수려하면서도 깔끔했다. 

유중당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가 바로 꼬마 장이라는 답변이었다. 

유중당이 안기도에 가고 싶다는 자신의 염원을 털어놓자, 꼬마 장도 선선하게 허락했다. 

하지만 아래와 같은 조건을 달고서였다.


“부사(副使)인 아무개 무관은 같이 갈 수 없습니다.”


그는 또 밖으로 나가 종자들을 두루 살피더니 

오직 두 사람만이 유중당을 따라나설 수 있다고 하였다.

점검이 끝나자 꼬마 장은 배를 준비시킨 뒤 유중당을 데리고 함께 길을 떠났다. 

뱃길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지 전혀 가늠할 길이 없었다. 

그저 미풍이 살랑살랑 불어와 마치 구름이나 안개를 젖히고 나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한참을 흘러가고 나자 어느덧 안기도에 도착했다는 전갈이었다.

그때는 혹한이 몰아치는 엄동이지만 섬의 기후는 온화하고 따뜻했으며

들꽃들이 바위며 골짜기 여기저기에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꼬마 장은 그들을 인도하여 어떤 동굴로 데리고 갔다. 

동굴 안쪽에는 노인 세 사람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중이었다. 

동쪽과 서쪽에 앉은 노인들은 냉랭한 태도로 유중당을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가운데의 노인만은 몸을 일으켜 손님을 맞이하고 인사를 나눴다.


유중당이 좌정하고 난 뒤 노인이 차를 내오라고 소리 지르자 동자 하나가 쟁반을 들고 밖에 나갔다. 

동굴 바깥쪽의 석벽에는 쇠못 하나가 꽂혀 있었는데 뾰족한 끝부분이 바위에 깊이 처박힌 상태였다. 동자가 쇠못을 뽑자 순식간에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찻잔에는 금세 물이 가득 고였다. 

잔이 채워지자 동자는 다시 쇠못을 꽂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막더니 

쟁반을 받쳐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잔 속의 물은 푸르스름한 빛깔이었는데 유중당이 슬쩍 맛을 보았더니 

어찌나 차가운지 이빨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그는 한기가 두려워 더 이상 잔을 입에 대지 않았다. 

노인이 동자를 돌아보며 턱짓을 하자, 

아이는 찻잔을 가져가 유중당이 남긴 물은 자기가 마셔버리고 다시 아까의 장소로 갔다. 

그리고 쇠못을 뽑고 물을 채워서 되돌아왔는데 

이번에는 향기와 김이 설설 끓어오르는 모양이 마치 화로에서 갓 꺼낸 차처럼 보였다. 

유중당은 내심 깜짝 놀라면서 자기 운명에 대한 지침을 내려달라고 노인에게 부탁했다.


“나는 세상 밖의 사람이라오. 

지금이 어느 해 무슨 달인지도 모르는 판에 무슨 수로 인간사의 길흉화복을 헤아리겠소?”


노인이 웃으면서 대답하자, 유중당은 다시 불로장생하는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졸랐다.


“그런 따위는 부귀 가운데 계신 분이 능히 해낼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유중당이 몸을 일으키며 작별을 고하자 꼬마 장이 여전히 그의 귀로를 배웅해 주었다.

조선 땅에 당도한 유중당이 자기가 겪었던 이상한 일들을 이야기했더니, 

국왕은 몹시 애석해하며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당신이 찻잔의 냉수를 다 마시지 않은 것이 아깝구려. 

그 물은 천지와 더불어 생겨난 옥즙(玉液)이라오. 한 잔으로 백 년의 수명을 늘렸을 것을.”


유중당이 귀국할 준비를 하자, 

조선 국왕은 종이와 비단으로 여러 겹 싼 선물을 내주면서 

바다 근처에서는 절대 풀어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유중당은 바다를 벗어나자마자 서둘러 물건을 끌렀는데

얼마나 꽁꽁 동여맸는지 수백 겹이나 포장이 되어 있었다.

마지막까지 모두 끄르고 나니 안에서는 거울 하나가 나타났다.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닷속 용궁에 사는 용족(龍族)들의 모습이 한눈에 또렷이 들어왔다.

바야흐로 정신을 집중하고 응시하는 사이, 

갑자기 해일이 다락보다 높게 일어나 흉흉한 기세로 밀어닥쳤다. 

일행은 깜짝 놀라 줄달음질 쳤지만 조수는 휘몰아치는 비바람보다 빠른 속도로 그들에게 덮쳐왔다. 

공포에 떨던 유중당이 물결을 향해 거울을 던지자 조수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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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대업(洪大業)은 서울 사람이다. 

그의 아내 주 씨(朱氏)는 자색이 몹시 고운 여자였는데 부부의 금실도 매우 좋았다. 

나중에 홍 씨는 계집종 보대(寶帶)를 첩으로 들였다. 

그런데 보대는 용모가 주 씨보다 훨씬 떨어지는데도 홍 씨는 유독 보대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주 씨는 이것이 불만스러워 매사에 남편과 반목하여 집안에는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홍 씨는 드러내고 첩의 방에서 자지는 않았지만 

더욱 보대를 총애하게 되어 주 씨와의 관계는 갈수록 소원해졌다.


훗날 그들은 이사를 해서 적씨(狄氏) 성을 가진 비단장수와 이웃하여 살게 되었다. 

적씨의 처인 항랑(恒娘)은 자기가 먼저 건너와 주 씨에게 안부 인사를 전했다. 

그녀는 서른을 좀 넘긴 나이였는데 용모는 수수했지만 

말하는 품이 매우 경쾌하고 달변이어서 주 씨는 단박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다음날은 주씨가 답방을 갔다. 

보아하니 그 집에도 나이가 스물쯤 되는 어린 첩이 있었는데 생김새가 매우 귀엽고 예뻤다. 

그들은 거의 반년을 이웃하여 살았지만 적씨네 집에서는 

욕하고 꾸짖는 소리가 한 번도 담장을 넘어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적씨는 유독 항랑만을 아끼고 사랑하여 첩은 단지 이름만 걸어놓은 존재일 뿐이었다.


하루는 주씨가 항랑에게 물었다.


“저는 줄곧 남편이 첩을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첩이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아내라는 명분을 바꿔 첩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지요. 

그런데 당신네 집을 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겠어요. 

부인은 대체 무슨 수단을 쓰시나요? 

만약 그 방법을 전수받을 수만 있다면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항랑은 그 말을 듣고 핀잔부터 날렸다.


“아유, 당신 자신이 남편을 멀어지게 해놓고 도리어 사내를 탓하시다뇨?

당신처럼 아침저녁으로 끊임없이 잔소리하면, 

이는 수풀 속으로 참새를 몰아넣는 것처럼 

남자의 마음을 당신에게서 더욱 멀어지게만 할 따름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남편이 얼마든지 보대를 가까이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세요. 

설사 남편이 제 발로 당신을 찾아오더라도 절대로 방 안에 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면 당신에게 또 방법을 생각해 드리지요.”


주 씨는 항랑의 말대로 보대를 더욱 예쁘게 단장시켜 남편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또 홍씨가 무엇을 먹고 마시든 간에 항상 보대와 함께 있도록 조처했다.

홍씨가 어쩌다 한 번씩은 주 씨를 기웃거렸지만,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남편을 거절하기에 바빴다. 

그러자 집안 식구들은 모두 입을 모아 주 씨의 부덕을 칭송하게 되었다.


이렇게 달포쯤 지내고 나서 주 씨는 다시 항랑을 찾아갔다. 

그녀는 주 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몹시 흐뭇해하면서 또 다른 지시를 내렸다.


“됐어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더 이상 치장하지 마세요. 

화려한 옷은 입지 말고 연지나 분도 바르면 안 됩니다. 

얼굴을 더럽게 하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은 채 하인들과 어울려 집안일을 하세요. 

그렇게 한 달이 지나면 다시 저에게 오십시오.”


주 씨는 집으로 돌아와 모든 일을 항랑이 시킨 대로 하였다.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더러워진 얼굴은 일부러 씻지 않고 내버려 두면서

날마다 길쌈에만 열심일 뿐 다른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홍대업이 그녀를 안쓰러워하며 보대에게 집안일을 분담시키려 하자, 

주 씨는 받아들이지 않고 번번이 그녀를 나무라며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주씨가 다시 항랑을 만나러 갔더니, 

그녀는 입에 침이 마르게 주 씨를 칭찬했다.


“당신은 정말 가르칠 맛이 나는 학생이로군요. 

모레는 상사절(上巳節)이니 당신을 초대해 봄동산으로 답청(踏靑)놀이를 가고 싶네요. 

그날은 해진 옷을 죄다 벗어버리고 옷이고 버선이고 신발이고 간에 

모두 새것으로 뽑아 입은 다음 일찌감치 저한테 건너오십시오.”


주 씨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지요!”


상사절 아침, 주 씨는 거울 앞에서 정성 들여 화장하고 모든 것을 항랑이 일러준 대로 시행했다. 

단장이 끝난 다음 항랑에게 건너갔더니, 그녀는 주 씨를 보고 기뻐하여 마지않았다.


“좋아요!”


항랑은 다시 주 씨를 대신하여 머리형을 봉황새 꼬리 모양으로 말아 올려주었는데, 

반들반들한 주 씨의 머릿결은 사람의 그림자까지도 비출 지경이었다. 

항랑은 옷소매가 유행에 맞지 않는다면서 소매 선을 잘라내 다시 바느질해 주었고, 

또 신발 모양이 너무 투박하다고 탓하더니 대나무 상자 안에서 

짓고 있던 신발을 꺼내 주 씨와 함께 완성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지자 항랑은 주 씨에게 새로 옷을 갈아입게 하였다. 

헤어질 즈음 항랑은 주 씨에게 술을 권하며 당부했다.


“집으로 돌아가 남편과 마주치게 되면 즉시 문을 닫아걸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십시오. 

그가 와서 문을 두드리더라도 절대로 방 안에 들이면 안 됩니다. 

세 번 정도 찾아오면 한 번만 받아들이세요. 

그가 당신에게 입맞춤하고 당신의 발을 주무르더라도 

계속 쌀쌀맞게 굴면서 기분 좋게 해주지 말아요. 

그렇게 반달쯤 지나면 다시 저를 찾아오십시오.”


주씨가 집으로 돌아가 현란한 차림새로 홍대업의 앞에 나타나자,

그는 자기 아내를 위아래로 뚫어지게 쳐다보며 평소와는 다른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주 씨는 놀러갔던 이야기를 잠깐 하고 손으로 턱을 고이며 피곤하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날도 저물지 않았는데 몸을 일으켜 자기 방으로 들어간 뒤 문을 잠그고 잠자기 시작했다.


얼마 후 과연 홍대업이 찾아와 방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주씨가 침상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하릴없이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저녁도 똑같은 상황이 재연되었다. 

그 이튿날 홍대업이 주 씨를 나무라며 까닭을 묻자, 그녀는 이렇게 응수했다.


“혼자 자는 게 이미 습관이 되어서요. 

당신이 또다시 저를 성가시게 굴면 감당하지 못할 것만 같아요.”


그날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부터 홍대업이 안방 차지를 하고 앉아 

아내를 기다리더니 주씨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얼른 등불을 끄고 그녀를 침상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마치 새색시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홍대업이 다음날 밤 다시 오겠다고 하자, 

주 씨는 늘 이러면 안 된다고 버티다가 결국은 사흘에 한 번씩으로 약속을 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반달이 지나 주씨가 다시 항랑을 찾아가자, 

그녀는 방문을 잠그고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했다.


“이제부터는 당신 혼자서 사내를 독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예쁘기는 하지만 요염하지가 않아요. 

당신의 자색으로 요염할 수만 있다면 서시(西施)라도 누를 수가 있을 텐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항랑은 주 씨에게 눈을 흘겨보라고 하더니,


“그게 아니에요! 바깥 눈초리를 그렇게 뜨면 안 되죠.”


하고 지적했다. 


또 그녀에게 웃어보라고 한 뒤,


“틀렸어요! 왼편 뺨에 문제가 있어요.”


라고 말하며 자기가 직접 교태를 담아 추파를 던지는 모양을 시범으로 지어 보였다. 


또 눈처럼 하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주 씨에게 그대로 흉내 내게 하였다. 

주 씨는 수십 번을 연습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항랑과 비슷해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항랑이 일렀다.


“이제는 돌아가세요! 집에 가서도 거울을 붙들고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해야만 합니다. 

이 밖에 더 이상의 비결은 없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의 일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시되 

남편이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을 그때마다 던져주세요. 

하기야 이런 일은 말로 전수할 수 있는 바가 아니지요.”


주 씨는 집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항랑이 가르쳐준 대로 시행했다.


홍대업은 더욱 흥분하면서 주 씨에게 푹 빠진 나머지 

아내의 방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항상 전전긍긍이었다. 

해가 저물기만 하면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홍대업은 안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날마다 되풀이되더니 홍대업은 결국 밀어내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주 씨는 그럴수록 보대에게 더욱 잘해 주면서 

방안에서 술자리를 벌일 때마다 불러와 한자리에 참석시켰다. 

그렇지만 홍대업의 눈에는 갈수록 보대가 더 못나 보였으므로 

자리가 파하기도 전에 그녀를 내보내는 일이 종종 생겨났다.


한번은 주씨가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여 보대의 방에 들어가게 한 다음 

바깥에서 자물쇠를 채워버렸는데, 홍대업은 보대의 몸에 밤새도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보대 역시 홍대업을 미워하게 되어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그를 욕하고 원망했다. 

홍대업은 갈수록 보대에게 싫증이 나 점차 매질까지 하게 되었고, 

그녀는 나름대로 분통을 터뜨리며 자신을 가꾸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더럽고 다 떨어진 신발을 걸치고 쑥대처럼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를 보면

더 이상 그녀를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루는 항랑이 주 씨에게 물었다.


“내 방법이 어떠하던가요?”


“당신의 수단은 그야말로 절묘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그러나 이 제자는 시키는 대로 따라는 했어도 그 안에 담긴 뜻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더군요.

남편을 내버려 두란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이었습니까?”


주 씨의 질문에 항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대는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하셨나요? 

사람의 정리란 낡은 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며, 

손안에 넣기 어려운 것은 보물처럼 알고 얻기 쉬운 것은 경시하게 마련이란 이야기 말이에요. 

남편이 첩을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꼭 예뻐서라기보다는 

이제 막 그녀를 손안에 넣었다는 사실이 흥겹고 

어렵사리 첩과 한자리에 있게 된 상황에 흥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고 실컷 먹게 하면 산해진미라도 물리기 마련인데 

맛도 없는 나물국이야 말할 나위 있겠어요?”


“화장을 지운 뒤 다시 화려하게 단장하게 만든 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한쪽에 방치해 두고 눈여겨보지 않으면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다 문득 아름답게 단장한 모습을 대하면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신선한 느낌이 드는 법입니다. 

예컨대 가난뱅이가 별안간 좋은 음식을 포식한 뒤 

예전에 먹던 겨 밥을 대하면 입맛이 당기지 않는 거나 매한가지 이치겠지요. 

또 쉽사리 몸을 허락하지 않다 보니 첩은 헌 사람이 되고 나는 새사람이 되며,

그녀는 쉽고 나는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당신이 말한 아내가 첩이 될 수 있는 방법이랍니다.”


주 씨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뻐하다가 드디어는 서로 비밀이 없는 안방 친구가 되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항랑이 돌연 주 씨에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의 정은 한 몸이나 다름없으니 당신에게 나의 신세를 숨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겠지요. 사실은 저번부터 말하려고 했지만 당신이 놀랄까 봐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곧 헤어질 마당이고 보니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저는 본래 여우랍니다.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못된 계모가 들어오는 바람에 서울까지 팔려오게 되었죠. 

다행히도 남편이 제게 잘해 주셔서 차마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오늘까지 차일피일 미뤄왔던 것입니다.

내일은 친정 아버님이 시해(尸解)에 드시는 날입니다. 

이번에 친정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주 씨는 항랑의 손을 붙들고 흐느껴 울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항랑의 집에 건너갔더니, 

온 집안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는 가운데 항랑의 자취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이사씨는 말한다.

구슬을 사면서 알맹이는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담았던 상자만을 보배로 여긴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새것과 헌것, 어려운 것과 쉬운 것 사이에 얽힌 심리는

천만년이 지나도 풀지 못할 의혹이려니와,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게 하는 수단은 바로 그런 마음에 대고 시행해야 효과가 나타난다. 

옛날의 간신배들은 임금을 섬길 적에 사람을 못 만나게 하고 책을 읽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지위를 유지하고 총애를 공고히 하려는 이들은 

모두 남의 속을 꿰뚫어 보는 비결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 상사절(上巳節) : 사대부집 부녀자들이 봄동산에 소풍 나가는 날. 

한대(漢代) 이전에는 음력 삼월 상사일(上巳日)이었지만, 

위(魏)나라 이후로는 삼월 초사흘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때는 봄풀들이 새로 돋아나는 절기이기 때문에 그날의 외출을 ‘답청(踏靑)’이라고 불렀다.


시해(尸解):도가에서는 도를 닦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만 인간 세상에 남아 있고 

혼백은 날아가 신선이 된다고 여기는데, 이를 ‘시해’라고 부른다.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도허(道虛)편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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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군(東郡)에 사는 아무개는 뱀 재주를 부려 먹고 사는 땅꾼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마리의 뱀을 공들여 키웠는데 둘 다 껍질이 푸른 빛깔이어서

큰놈은 대청(大靑), 작은놈은 이청(二靑)이라고 불렀다.

이청의 대가리에는 붉은 반점이 찍혀 있었는데 유난히 영리하고 길이 잘 들어

똬리를 틀거나 회전 묘기를 부릴 때 한 번도 만족스럽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청에 대한 땅꾼의 사랑도 남달라 다른 뱀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일 년이 지난 뒤 대청이 죽었다.

땅꾼은 다른 뱀으로 대청의 빈자리를 메우고 싶었지만, 도무지 물색하러 다닐 겨를이 나지 않았다.


하루는 땅꾼이 어느 산사에서 밤을 지새우게 되었다.

날이 밝은 뒤 그가 대나무 궤짝을 열었더니 이청의 자취가 별안간 묘연했다.

땅꾼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어서 차라리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는 곳곳으로 행방을 찾아다녔지만 어디서도 이청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편으론 깊은 산이나 우거진 수풀에 다다르면

언제나 이청을 풀어주고 맘대로 뛰놀게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되돌아왔던 기억이 났다.

이 때문에 땅꾼은 이청이 저절로 돌아올 거란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앉은자리에서 내처 이청을 기다렸다.


어느덧 해가 중천에 높이 떠올랐지만 이청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절망했고 쓰라린 심정으로 갈 길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 문을 나서서 몇 발짝 걸어갔을 무렵, 그의 귀에 우거진 풀숲을 헤치는 소리가 ‘쉬익쉭’ 들려왔다.

놀라 발길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더니 바로 이청이 돌아오는 소리였다.

땅꾼은 엄청난 보배를 얻은 것처럼 기뻐 어쩔 줄을 몰랐다.

그가 길가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하자 뱀도 따라서 움직임을 멈췄다.

그런데 이청의 뒤편을 바라보니 웬 작은 뱀 한 마리가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땅꾼은 이청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나는 네가 아주 가버린 줄 알았다.

이제 보니 요런 꼬마 동무를 추천하려 했던 것이냐?”


말하는 사이 그는 사료를 꺼내 이청에게 먹이면서 아울러 꼬마 뱀에게도 똑같이 나눠 주었다.

꼬마 뱀은 비록 물러서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널름 받아먹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몸뚱이를 움츠리는 것이 감히 엄두가 안 난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청은 먹이를 물더니 흡사 주인이 손님에게 음식을 권하듯 직접 꼬마 뱀의 아가리에 물려주었다.

땅꾼이 다시 사료를 건넸더니 그때부터는 꼬마 뱀도 더 이상 사양하지 않고 받아먹었다.

식사가 다 끝난 뒤에는 꼬마 뱀도 이청을 따라 땅꾼의 궤짝 안으로 들어갔다.

땅꾼은 꼬마 뱀도 짊어지고 다니면서 교육했는데, 똬리를 틀고 몸통을 비트는 

모든 동작이 법도에 제대로 들어맞아 이청의 수준과 거의 맞먹을 정도였다.

이리하여 꼬마 뱀은 이름도 소청(小靑)이라 불리게 되었다.

땅꾼은 사방을 돌며 재주를 부렸고 이 두 뱀 덕분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돈을 전대에 챙겨 넣었다.


일반적으로 땅꾼이 뱀 재주를 부릴 때는 뱀 길이가 두 자를 넘기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다.

너무 자라면 무게가 초과해서 몸놀림이 쉽지 않게 되므로 다른 뱀으로 바꿔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청만은 워낙 길이 잘 들어 땅꾼도 그를 쉽게 내버릴 수 없었다.


다시 이삼 년이 지나는 사이, 이청은 석 자가 넘도록 자라났다.

놈이 궤짝에 들어서면 안이 꽉 차 다른 공간이 없을 정도였으므로 

땅꾼도 마침내는 놈을 내다 버릴 결심을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땅꾼은 치천에 있는 동산(東山)에 올라

맛난 먹이를 이청에게 먹이고 아울러 축복의 말을 건네며 놈을 풀어주었다.

이청은 움직이는 듯하더니 잠시 뒤 다시 기어와 궤짝 바깥에 똬리를 틀었다.

땅꾼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소리쳤다.


“가거라! 세상 어디에도 백 년 동안 줄곧 열리는 잔치는 없단다.

이제부터는 깊은 산골짝에 몸을 숨겼다가 앞으로 꼭 신룡(神龍)이 되어야지.

궤짝 안이 어찌 오랜 세월 버틸 만한 곳이겠니?”


뱀은 그제야 떠나갔고 땅꾼은 눈길로 그를 전송했다.

하지만 얼마 뒤 뱀은 다시 돌아와 아무리 손을 내저어도 떠나지 않고

대가리로 자꾸만 궤짝을 들이받았다.

소청도 안에서 가만있지 못하고 계속해서 꿈틀거렸다.

땅꾼은 그제야 이청의 뜻을 깨달았다.


“소청에게 작별인사를 하려는 것이냐?”


그가 궤짝을 열자 소청이 재빨리 기어 나왔다.

두 마리의 뱀은 서로 대가리를 휘감고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품이 이별의 말을 전하는 것 같았다.



이윽고 두 마리는 꿈틀거리며 어디론가 기어갔다.

땅꾼은 소청이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놈은 얼마 뒤 유유자적한 표정으로 혼자 기어오더니 곧장 궤짝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이때부터 땅꾼은 사방을 헤맸지만, 소청의 짝으로 적당한 놈을 찾아낼 수는 없었다.

나중에 그는 한 마리를 구해 제법 열심히 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그 뱀은 끝내 소청처럼 영리하지는 못했다.


어느덧 소청도 어린아이의 팔뚝만큼이나 몸통이 굵어지고 있었다.

이에 앞서 산속으로 들어간 이청은 자주 나무꾼들의 눈길을 끌고 있었다.

다시 몇 년이 지나는 사이 이청은 길이가 몇 자나 되도록 자라났고 몸통도 사발만 하게 굵어졌다.

그는 차츰 오가는 행인들을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이로 말미암아 오가는 여행객들은 서로에게 주의를 주면서 

이청이 출몰하는 길에는 감히 나다니지 않게 되었다.


하루는 땅꾼이 그 장소를 지나는데 갑자기 어떤 뱀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땅꾼이 기겁하고 달아나자 뱀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추격해 왔다.

땅꾼이 고개를 돌렸더니, 뱀은 벌써 그가 있는 장소 근처에까지 다가와 있었다.

문득 뱀의 대가리를 바라보니 붉은 점이 선명했으므로

땅꾼은 그제야 놈이 이청임을 깨닫고 어깨짐을 내려놓으면서 소리쳤다.


“이청아, 이청아!”


뱀은 순간 추격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한참이나 땅꾼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예전에 묘기 부리던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몸뚱이를 땅꾼의 몸에 휘감으며 올라왔다.

땅꾼은 뱀에게 악의가 없는 줄 알았지만, 놈의 몸통이 너무나 굵어져 그 재롱을 감당할 길이 없었다.

그는 땅바닥에 엎어지며 뱀에게 사정했고 이청도 그제야 옛 주인을 풀어주었다.

놈이 또 대가리를 궤짝에 쿡쿡 쥐어박았으므로 

땅꾼도 그의 뜻을 깨닫고 뚜껑을 열어 소청을 꺼내주었다.

두 마리의 뱀은 오랜만의 상봉이 반가운 듯 서로를 엿가락처럼 휘감고

한참을 비빈 다음에야 각자에게서 떨어졌다.

땅꾼이 소청에게 부탁의 말을 전했다.


“오랫동안 너와 헤어지려고 생각했더랬는데 오늘에야 네가 짝을 만났구나.”


그는 또 이청에게도 당부했다.


“본디 네가 인도해 왔으니 네가 다시 소청을 데려가거라.

그리고 또 한 가지 부탁의 말이 있다.

깊은 산속이라도 먹고 마실 것이 부족하지는 않을 터, 부디 오가는 행인들을 괴롭히지 말아라.

그래야 하늘의 벌을 면할 수 있지 않겠니?”


두 마리의 뱀은 알아듣겠다는 듯 고개를 숙이고 땅꾼의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신속히 몸을 움직여 그 자리를 떠났는데 큰놈이 앞장서고 작은놈은 뒤따르는 식이었다.

그들이 지난 자리에는 초목들이 넘어져 새로운 길이 생겨났다.

땅꾼은 뱀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한동안 그 자리에 선 채로 지켜보았다.


그때부터 연도에는 다시 예전처럼 행인이 오가게 되었고

두 마리의 뱀은 어디로 갔는지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이사씨는 말한다.

뱀이란 천성이 아둔한 미물일 따름인데 옛 친구에 대해 그토록 애틋한 정을 품기도 하는구나.

게다가 기둥을 휘감듯 사람의 권고까지도 잘 따르다니, 그저 신통할 뿐이다.

유독 사람 탈을 뒤집어쓴 것들만 행동이며 처신이 괴이하기 이를 데 없다.

10년을 깊이 사귄 친구요, 몇 대에 걸쳐 은혜를 입은 주인일지라도

일단 이해관계가 상충하면 우물에 밀어 넣고 돌멩이를 던져 넣는 것이 사람이란 치들이다.

또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서로 간에 충고는 고사하고 얼굴을 붉히며 원수가 되기 일쑤이니,

이런 자들은 뱀들 보기에도 부끄러울 따름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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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휘(衛輝)에 사는 척생(戚生)은 풍류를 즐기는 멋스러운 젊은이로

무슨 일을 당해도 겁내지 않는 담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당시 어느 명문가의 큰 저택에서 대낮에도 귀신이 나타나

죽는 사람이 꼬리를 물자 집주인은 헐값에 집을 팔려고 내놓았다.


척생은 집값이 터무니없이 싼 데 혹해 자신이 사들인 뒤 옮겨 가 살았다.

하지만 집은 넓은 데 반해 식구가 적었기 때문에

동쪽 정원의 정자에 잡초가 무성히 자라 숲을 이루는데도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식구들은 밤만 되면 종종 깜짝깜짝 놀라면서 번번이 귀신을 보았다고 소란을 떨곤 하였다.

그 집으로 들어간 지 두 달 정도 지났을 때 계집종 하나가 죽었다.

또 얼마 뒤에는 척생의 아내가 해 질 무렵 

정원의 정자에 다녀오더니 병이 들어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다.

더욱 겁에 질린 식구들이 다른 곳으로 이사하자고 졸랐지만 척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다만 짝없는 외로운 신세가 처량하고 한심스러워 스스로 상심할 따름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귀신을 보았다는 남녀 하인들의 아우성은 도무지 그칠 줄을 몰랐다.

척생은 화가 치밀어 내친김에 이불 보따리를 싸 가지고 허물어져 가는 정자에 홀로 잠자러 갔다.

그는 촛불을 켜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나 살펴보려 했지만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기척이 없자 마침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갑자기 누군가가 이불 속으로 손을 뻗더니 척생의 몸을 더듬었다.

설핏 잠이 깬 척생이 올려다보니, 웬 늙수그레한 여종 하나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녀는 귓불이 오그라들었고 머리는 쑥대처럼 헝클어졌으며

허리가 굽고 뚱뚱해서 차마 사람으로 쳐주기가 어려운 몰골이었다.

척생은 그녀가 귀신인 줄 알고 팔목을 붙잡아 냅다 밀치는 한편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가르침을 받들기는 어렵겠는걸!”


여종은 창피했던지 얼른 손을 빼며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잠시 뒤 또 다른 여자가 서북쪽 모서리로부터 모습을 드러냈는데

얼굴과 자태가 앞선 여종과는 달리 아주 아름다웠다.

여자는 훌쩍 등불 앞으로 다가들며 성난 목소리로 그를 꾸짖었다.


“어디서 온 겁 없는 녀석이기에 무엄하게 여기 누워 있단 말이냐!”


척생은 일어나 앉으며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소생은 이 집의 주인 되는 사람이오.

당신한테 방세를 받으려고 기다리던 중이었소.”


말을 마치자 그는 벌떡 일어나 벌거벗은 몸으로 그녀를 낚아챘다.

여자는 황급히 달아났지만 척생이 그보다 먼저 서북쪽 모서리로 달려가 그녀의 도주로를 차단했다.

여자는 달아날 길이 막히자 척생이 잠자던 침상 위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사내는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등불 아래서 바라본 그녀의 모습은 마치 선녀처럼 아름다웠다.

척생이 그녀를 서서히 품 안에 끌어안자, 여자가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이 정신 나간 양반아, 당신은 귀신이 무섭지도 않나요? 저는 당신을 해칠 수도 있어요.”


척생이 강제로 치마를 벗겨도 그녀는 별로 저항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정사가 끝나자 여자는 스스로 자기의 신세를 밝혔다.


“저는 성이 장(章)이고 이름은 아단(阿端)이라 해요.

잘못해서 바람둥이한테 시집을 갔는데 남편이란 작자는 성질이 고약하고 사나웠지요.

제멋대로 저를 폭행하고 못살게 구는 바람에 속을 끓이다가

일찍 요절해서 이곳에 묻힌 지 벌써 이십 년이 넘었답니다.

이 집의 땅 밑은 원래가 전부 무덤이에요.”


“아까 그 늙은 여종은 어떤 사람인가?”


“그녀도 오래전에 죽은 귀신인데 저의 시중을 들고 있지요.

위쪽에 산 사람이 살면 지하에 있는 귀신들도 편안히 지낼 수가 없어요.

조금 전의 사단도 당신을 쫓아보내라고 제가 시킨 짓이었지요.”


“그 여자가 왜 이불 속에 손을 넣어 나를 주물럭거렸지?”


그 말에 아단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설명했다.


“그 여종은 나이 서른이 넘도록 사내를 경험해 보지 못했거든요.

그 사정도 참으로 딱하긴 하지만 고것이 너무 제 분수를 모르는군요.

결론적으로 말해 나약하고 겁이 많은 사람은 귀신의 더할 나위 없는 노리개가 되지만

담력이 센 사람에겐 귀신도 감히 덤벼들지 못한답니다.”


아단은 근처에서 울리는 새벽종 소리를 듣자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침상을 내려서며 말했다.


“제가 싫지 않으시다면 저녁에 다시 올게요.”


그날 밤 아단은 약속대로 다시 찾아왔고 두 사람의 사랑은 갈수록 무르익었다.


척생이 문득 입을 열었다.


“내 집사람이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떴다네.

그립고 애통한 마음이 가슴속에서 못내 떠나지 않으이.

당신이 나를 위해 그녀를 불러올 수는 없겠소?”


아단은 그 말에 몹시 서럽다는 듯 표정이 일그러졌다.


“제가 죽은 지도 이십 년이 되지만 누가 한 번만이라도 저를 그리워하며 보고파 했을까요?

당신은 정말 다정한 분이시군요. 저도 가능한 한 있는 힘을 다해 도와드리겠어요.

하지만 듣자니 그분은 다시 태어날 곳이 정해졌다던데 아직 저승에 계시기나 할지 모르겠군요.”


이튿날 밤 아단이 척생에게 알려왔다.


“아씨는 곧 어떤 부잣집에 태어나게 되었대요.

하지만 생전에 잃어버린 귀걸이를 추궁하느라 계집종에게 매질을 한 적이 있는데

매 맞은 여종이 그만 목을 매 자살하고 말았다지요.

이 사건이 아직 해결되지 않은 바람에 지금까지 환생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약왕전(藥王殿·역주)의 낭하에 수감되어 간수가 지키고 있답니다.

제가 여종을 시켜 간수에게 뇌물을 주면 바로 데려올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어떻게 해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소?”


척생의 질문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억울하게 죽은 귀신은 스스로 자수하지 않으면 염라대왕도 알지 못하는 법이지요.”


이경(二更)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자 늙은 여종이 과연 척생의 처를 데리고 나타났다.

척생은 아내의 손을 부여잡으며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고,

그의 처도 울음을 삼키느라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단은 작별 인사와 더불어 자리를 비키면서 말했다.


“두 분이 오랜만에 상봉하셨으니 말씀들 나누세요. 저는 다른 날 밤에 다시 뵙기로 하지요.”


척생이 아내를 위로하며 계집종의 자살에 얽힌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괜찮아요. 거의 다 해결되었어요.”


두 사람은 침상에 올라가 서로를 끌어안았는데

그 정겨움이나 즐거움은 처가 살아 있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때부터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닷새가 지나자 척생의 처는 갑자기 엉엉 울음을 터뜨렸다.


“저는 내일 산동으로 가서 다시 태어나야만 해요.

이번에 헤어지면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을 테니, 어쩌면 좋아요?”


척생이 그 말을 듣고 통곡하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자, 아단이 그들을 위로하고 나섰다.


“저한테 한 가지 계책이 있어요. 두 분이 잠시나마 함께 계실 수 있을 거예요.”


두 사람은 눈물을 거두고 그녀에게 바짝 다가들어 방법을 물었다.

아단은 지전 열 꿰미를 남쪽 집의 살구나무 아래에서 태우면

환생을 전담하는 차역에게 뇌물이 전달되고 그러면 환생 시일을 늦출 수 있다고 일러주었다.

척생은 아단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날 저녁 척생의 처는 즐거운 표정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아단 낭자의 덕을 많이 봤어요. 이제부터 열흘간은 떨어지지 않을 수 있답니다.”


척생은 너무나 기뻐 돌아가는 아단을 만류하여

자신들의 침상 곁에 또 하나의 침상을 잇대어 놓고 거기서 잠을 자게 하였다.

그리고 밤낮없이 함께 지내며 환락이 곧 끝날 것만을 걱정했다.

그렇게 칠팔일이 지났다.

정해진 기한이 거의 돌아오자 척생 내외는 밤새도록 통곡을 그치지 않으며

아단에게 또 다른 방법을 알려달라고 매달렸다.


“상황을 보아하니 더는 손을 쓰기가 어려워요.

하지만 시도야 한번 해볼 수 있겠지요.

이 일은 저승 돈으로 백만 냥을 쓰지 않으면 안 돼요.”


척생은 아단이 말한 액수만큼 지전을 살랐다.

얼마 뒤 아단이 나타나더니 흡족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제가 사람을 보내 담당자에게 사정 이야기를 했어요.

처음에는 난색을 표하다가 많은 돈을 보더니 마음이 움직이는 눈치더군요.

이제는 다른 귀신이 벌써 부인을 대신하여 환생했지요.”


이때부터 두 사람은 낮에도 척생의 곁을 떠나지 않게 되었다.

아단은 척생에게 문과 창문을 모두 틀어막게 한 뒤 밤낮으로 등불을 켠 채 생활했다.


그렇게 일 년여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아단은 갑작스럽게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이상한 병에 걸렸다.

속이 언짢고 괴로우면서도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병세를 보면 

사람이 귀신을 보았을 때의 증상과도 흡사했다.

척생의 아내가 아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건 귀신한테 홀려서 난 병이야.”


그 말에 척생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아단은 이미 귀신인데 또 무슨 귀신이 병을 냈다고 그러나?”


“그렇지 않아요.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고 귀신이 죽으면 적( 역주 )이 되지요.

귀신이 적을 무서워하는 것은 사람이 귀신을 겁내는 거나 매한가지랍니다.”


척생이 무당을 불러 아단의 병을 치료하자고 제안하자 그의 처는 수긍하지 않았다.


“귀신의 병을 사람이 어떻게 낫게 할 수 있겠어요?

우리 이웃에 사는 왕 노파는 지금 저승에서 무당 일을 보고 있으니 그 사람을 불러옵시다.

하지만 여기서 십여 리나 가야 하는데 저는 다리가 약해서 먼 길은 갈 수가 없어요.

번거롭겠지만 당신이 짚으로 엮은 말 한 마리만 불살라 주세요.”


척생은 아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짚으로 만든 말이 재가 되는가 싶더니 곧바로 늙은 여종이

붉은 빛깔의 말 한 마리를 끌고 와 마당에서 말고삐를 척생의 처에게 건네주었다.

말 위에 올라탄 척생의 처는 곧 어디론가 사라졌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노파와 나란히 말 잔등에 걸터앉은 채

나타난 척생의 처는 먼저 말을 낭하의 기둥에 매어놓았다.

노파는 안으로 들어와 아단의 열 손가락을 모두 짚어보더니

꼿꼿하게 앉아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온갖 작태를 골고루 지어 보였다.

노파는 한참 동안 땅바닥에 엎어져 있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서더니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나는 흑산대왕(黑山大王)이시다.

낭자의 병이 위독하지만 요행으로 나를 만났으니 그 복이 적지만은 않구나!

이는 흉악한 귀신이 내린 재앙이나 대단치는 않아, 상관없단 말이다!

하지만 병이 나으면 반드시 나에게 풍성한 공양을 바쳐야 하느니,

은 덩어리 백 개와 지전 백 꿰미,

그리고 호화로운 잔칫상을 차리되 그 중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지면 아니 되렷다.”


척생의 처는 큰소리로 일일이 그러겠노라고 응낙했다.

그러자 노파는 또 땅바닥에 엎어졌다가 정신을 차렸고

다시 병자를 향해 고함을 지른 뒤 푸닥거리를 끝냈다.

곧이어 노파가 돌아간다고 작별인사를 하자,

처는 그녀를 정원 밖까지 배웅하면서 타고 온 말을 그녀에게 선사했다.

노파는 좋아라 하며 말을 타고 돌아갔다.


그들이 방으로 들어왔더니 아단은 약간 정신이 드는 모양이었다.

부부가 몹시 기뻐하며 함께 위로하는데 아단이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저는 아마도 인간 세상을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눈만 감으면 원귀들이 보이니, 이것도 운명이겠죠!”


그리고 눈물을 쏟는 것이었다.

하룻밤이 지나자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그녀는 허깨비라도 본 듯 온몸을 자벌레처럼 꼬부리고 사시나무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그리고 척생을 이불 속으로 잡아당기며 그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는데

마치 누군가 자신을 잡아가기라도 할까 봐 무서워서 그러는 것 같았다.

이런 상태로 육칠 일이 지나갔지만, 부부는 속수무책이라 그저 마음만 졸일 뿐이었다.


때마침 척생에게 일이 생겼다.

그가 외출했다가 반나절 만에 돌아왔더니 처의 통곡 소리가 들렸다.

놀라 까닭을 물었더니 아단이 벌써 죽었다는 이야기였다.

침상 위에는 뱀이 허물을 벗은 듯 옷가지만 남아 있었으므로

척생이 들춰보니 백골 한 무더기만 소복이 쌓여 있을 뿐이었다.

척생은 한바탕 통곡하고 나서 사람이 죽었을 때와

똑같이 예의범절을 갖춰 그녀를 조상의 무덤 곁에 장사 지냈다.


어느 날 밤, 척생의 처가 꿈을 꾸면서 서러운 흐느낌을 그치지 않았다.

척생이 그녀를 흔들어 깨우며 왜 우는지 까닭을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하였다.


“조금 전 꿈속에 아단 낭자가 나타나 하는 말이,

그녀의 남편이 적귀가 되었다는군요.

그녀가 죽은 뒤 수절하지 않았다고 화를 내면서 앙심을 품고 목숨을 빼앗으려 한대요.

자기를 위한 불공을 올려달라고 저한테 애걸하더군요.”


이튿날 척생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단이 부탁한 대로 불사를 벌일 채비를 서둘렀다.

하지만 그의 처가 남편을 만류하고 나섰다.


“귀신을 구제하는 것은 당신의 힘으로 될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가더니 한참 만에 되돌아왔다.


“제가 벌써 스님들을 모셔오라고 사람을 보냈어요.

당신은 먼저 지전을 태워 제를 지낼 비용을 만드셔야 합니다.”


척생은 아내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해가 서산으로 기울 무렵,

승려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는데 그들이 사용하는 바라며

법고는 인간 세상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척생의 처는 시끄러운 소리가 귀에 쟁쟁 울린다고 말했지만,

척생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법회가 끝난 뒤 척생의 처는 또다시 아단이 찾아와 감사의 말을 전하는 꿈을 꾸었다.


“덕분에 저의 원업이 모두 풀려 이제는 성황신의 딸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저 대신 서방님께도 감사하단 말씀을 전해 주세요.”


척생 부부는 삼 년 동안 내내 함께 살았다.

처음에는 식구들도 생소한 이야기에 무서워 떨었지만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그런 상태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그들은 척생이 집에 없을 때면 창문 너머로 마님의 지시를 받기도 하였다.

하루는 척생의 처가 남편을 향해 울면서 말했다.


“예전에 저의 압송을 맡았던 차역에게 뇌물을 준 일이 발각 났어요.

지금 조사가 진행 중인데 상황이 매우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으니

당신과 오래도록 함께하지는 못할 것 같아요.”


며칠 뒤 척생의 처는 과연 병이 들었다.


“우리 부부의 금실이 워낙 좋으므로

저는 언제까지나 죽은 상태로 있기를 원하며 다시 태어나길 바라지 않았지요.

이제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지만, 이 어찌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하겠습니까!”


척생이 황급하게 대책을 물었지만, 그의 처는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은 손쓸 방도가 없습니다.”


“벌 받으면 어쩐다지?”


“약간의 가벼운 벌은 받아야 하겠죠.

하지만 삶을 훔친 죄는 커도 죽음을 훔친 죄는 아주 작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자세히 살펴보려 하는 사이, 그녀는 얼굴과 형체가 차츰 사라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뒤로도 척생은 밤마다 정자에서 혼자 잠자며 다시 귀신을 만날 수 있길 기대했다.

하지만 어떤 기미도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식구들의 마음도 차츰 안정되어 갔다.




(※ 약왕전(藥王殿):약왕보살이 계신 전각. 

‘약왕’은 중생의 몸과 마음을 양약으로 치료해 주는 불교의 한 보살이다.


적 : 귀신이 죽어 변한다는 전설적 존재. ‘오음집운(五音集韻)’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니, 누구나 귀신을 보면 무서워한다.

귀신이 죽으면 적이 되는데, 귀신도 적을 보면 두려워한다. 

만약 전서체로 ‘적’ 자를 써서 문에 붙여놓으면 모든 귀신이 천 리 밖으로 멀리 달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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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생(車生)이란 사람은 가산이 넉넉하진 못했지만 술 마시기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매일 밤 몇 잔이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침대맡에 놓인 술병은 빈 적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그가 잠에서 깨어나 몸을 옆으로 뒤척이는데 

누군가 다른 사람이 곁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덮고 자던 의복이 흘러내린 줄로만 알았는데, 

더듬어보니 고양이와 비슷하면서도 크기는 그보다 큰 털북숭이가 손에 잡혔다. 

등불을 비춰보니 여우 한 마리가 술에 진탕 취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다시 침상 맡의 술병을 들여다보았더니 벌써 말끔히 비워진 상태였다. 

차생은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녀석은 진정 나의 술벗이로다.”


그는 차마 여우를 놀라게 해 깨울 수가 없었으므로 

자기 윗도리로 여우를 덮어 감싸주며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촛불은 켠 채로 두어 여우가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려 하였다.

한밤중이 되었을 때 여우가 하품하면서 기지개를 켜자, 차생은 웃으면서 말했다.


“달게도 자는구나!”


그가 여우에게 덮어준 옷을 들춰보니, 

갓을 쓴 준수하게 생긴 선비 하나가 그 자리에 누워 있었다. 

선비는 일어나 침대 아래서 절을 하더니

차생이 자기를 죽이지 않은 은혜에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차생은,

“나는 술에 중독되었다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바보 취급하지. 

자네만이 나의 진정한 벗일세. 

자네가 만약 나를 꺼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조구(糟丘)의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겠지.”


라고 말하면서 다시 여우를 침상 위로 잡아끌어 나란히 잠을 잤다. 

한편으로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자네, 자주 찾아오게나. 아무 염려 하지 말고.”


여우도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다음날 차생이 자리에서 일어나보니, 여우는 벌써 가버리고 없었다. 

그는 좋은 술을 한 병 따로 준비해 놓고 여우가 찾아오기만 기다렸다. 

저녁이 되자 여우는 약속대로 그를 방문했다. 

둘은 서로 무릎을 맞대고 즐겁게 술을 마셨다.

여우는 대단한 호주가인 데다 우스개 농담도 잘했으므로 

차생은 둘이 너무 늦게 만난 것이 애석해 죽을 지경이었다.


어느 날 여우가 말했다.


“언제나 당신에게 좋은 술을 대접받고 있으니 그 은혜에 어떻게 보답할까요?”


“기분 좋게 몇 잔 마시는 것에 불과한 일인데 그런 얘기는 무엇하러 입에 올리는가!”


“그렇긴 하지만 당신은 가난한 선비이니 장두전(杖頭錢) 마련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당신을 위해 약간의 술값을 마련해 보죠.”


다음 날 저녁 여우가 오더니 차생에게 일렀다.

“여기서 동남방으로 칠 리를 가면 길가에 돈이 떨어져 있을 테니,

내일 아침 일찌감치 가서 주워오십시오.”


이튿날 아침 차생은 그곳으로 갔다가 과연 두 냥의 은자를 주울 수 있었다.

그는 이 돈으로 그날 저녁에 마실 술상을 차렸다. 

한번은 또 여우가 이렇게 말했다.


“뒤란에 있는 움 속에 돈이 묻혀 있을 테니 한번 파보십시오.”


여우의 분부에 따랐더니 그 안에서는 일백여 꿰미의 돈이 나왔다. 

차생은 기뻐하면서 여우에게 말했다.


“주머니에 돈이 생겼으니 이제는 술값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겠구먼.”


“꼭 그런 것은 아니지요.

어찌 수레바퀴 사이에 고인 물을 오랜 시간 퍼낼 수가 있겠습니까? 

마땅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여우는 그렇게 말하더니, 어느 날 차생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지금은 시장에 나온 메밀 가격이 아주 쌉니다. 

이것을 매점매석해서 쌓아두고 값이 오르기를 기다리십시오.”


차생은 여우의 말대로 메밀 사십여 석을 사들였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모두 속으로 차생을 비웃었다. 


오래지 않아 큰 가뭄이 들어서 파종한 작물들은 죄다 말라 죽었고 오직 메밀만을 심을 수 있었다.

차생은 자기가 사들였던 메밀을 종자로 내다 팔아 열 배의 이문을 남겼다.

줄곧 이런 식으로 나가다 보니 그는 갈수록 부유해져 비옥한 땅을 이백 마지기나 사들이게 되었다. 


그는 무슨 일이든 전부 여우에게 물어서 결정했다.

여우가 보리를 많이 심으라는 해에는 보리가 풍년이 들었고, 

기장을 많이 심으라는 해에는 기장의 수확이 좋았다.

이렇듯 파종하는 작물과 시기를 모두 여우가 결정해 주는 대로 따라서 하다 보니

차생과 여우의 우정은 해가 갈수록 깊어만 갔다. 


여우는 차생의 아내를 형수라고 불렀고 아들은 자기 친자식처럼 예뻐하였다. 

그러나 훗날 차생이 죽고 나자 여우도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 조구(糟丘) : 술지게미로 쌓은 작은 언덕이란 뜻. 

술을 가리키는 말로 ‘신서(新序)’의 절사(節士)편에 나온다.

“걸왕이 술로 연못을 만들었는데 배도 띄울 수 있을 정도였고, 

쌓아놓은 술지게미는 칠 리 밖에서도 보였다(桀爲酒池 足以運舟 糟丘足以望七里)”라는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Posted by 김허니브레드

장안(長安) 땅에 방동(方棟)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지역 사회에 상당히 재주 있다고 알려진 명사였지만 사람됨이 경박하고 예절을 지킬 줄 몰랐다. 

들길을 걷거나 들판에서 노니는 여자라도 만나게 되면 언제나 히죽거리며 그 뒤를 따라다니곤 하였다.


청명절 하루 전날이었다. 

방동은 우연히 교외로 나갔다가 깜찍하고 귀여운 수레 한 대를 보았다. 

수레에는 붉은색의 수놓은 휘장이 처져 있었고, 

말을 탄 시녀 몇 명이 수레 뒤편에서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중의 한 시녀는 조그만 망아지를 타고 있었는데 유별나게 예뻤으므로

방동은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슬금슬금 그쪽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수레의 휘장이 젖혀지면서 안쪽에 앉아 있던 한 묘령의 여자가 드러났다. 

곱게 단장한 그녀는 방동이 여태까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눈앞이 어지러웠고 혼백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방동은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계속 수레를 따라갔다. 

그렇게 몇 리 길을 가다가 문득 수레 안의 여자가 시녀를 가까이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날 위해 휘장을 쳐다오. 

어디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는 건방진 녀석이 끊임없이 나를 훔쳐보고 있구나!”


시녀는 명령대로 휘장을 내리더니, 화가 나 방동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이분은 부용성(芙蓉城) 일곱째 서방님이 새로 맞은 마님이신데 

친정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길이시다. 

보통 농가의 부녀자가 아니시니, 어찌 너 따위 수재가 함부로 넘겨볼 수 있더란 말이냐!”


말을 마치자 그녀는 수레가 지나간 바퀴 자국에서 흙을 한 줌 집더니 방동을 향해서 뿌렸다. 

방동은 삽시간에 눈꺼풀이 감기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가 눈을 비비는 동안 수레와 말들은 멀리 사라져갔고, 그 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한편 놀라고 또 의아하게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눈이 계속 불편하기에 사람을 시켜 눈꺼풀을 뒤집어 살펴보게 했더니, 

눈동자 위에 조그맣게 백태가 끼어 있다고 하였다. 

하룻밤이 지나자 눈병은 더 심해져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백태는 점점 커지더니 며칠 만에 동전만 한 두께로 자라났다. 

오른쪽 눈에는 또 나선형의 두꺼운 꺼풀이 자라났는데 양쪽 다 어떤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그는 초조하고 걱정이 되어 죽고만 싶었고 차츰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게 되었다.


누군가 ‘광명경(光明經)’을 읽으면 재난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자, 

그는 즉시 한 권을 구해서 다른 사람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차츰 시일이 흐르면서 마음도 서서히 안정되어 갔다. 

그는 아무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날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염주를 굴리며 불경을 외웠다. 

이렇게 일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사이, 그는 온갖 잡념이 다 가라앉아 평온한 심정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왼편 눈 속에서 파리가 왱왱거리는 듯이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칠흑처럼 깜깜해. 도대체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아!”


그러자 오른편 눈 속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 함께 나가서 돌아다니면 이 답답한 기분이 나아질 거야.”


방동은 마치 조그만 벌레가 꿈틀거리기라도 하는 양 

서서히 콧속이 가려워지면서 무언가 콧구멍 안쪽에서 기어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이 지나자 그 물체는 다시 콧속으로 돌아왔고, 

또 콧구멍에서 눈동자 쪽으로 움직여갔다. 

그들은 눈 속으로 되돌아오자 또다시 속삭였다.


“오랫동안 정원에 나가 보지 않았더니 어느 사이 진주란(珍珠蘭)이 말라 죽었어!”


방동은 원래부터 난초를 좋아해서 

정원에 여러 품종을 심어두고 날마다 직접 물을 주며 가꾸는 취미가 있었다. 

하지만 두 눈이 멀게 된 이후로는 난초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진주란이 말라 죽었다는 말을 듣자 당장 부인을 불러 물어보았다.


“어쩌다 뜰 안의 진주란을 말라 죽게 했소?”


부인은 그에게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고, 

방동은 눈 속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일러주었다. 

부인이 정원으로 달려가 살펴보니 

난초꽃이 정말로 시들어 죽어 있었으므로 별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방 안에 숨어 열심히 동정을 살피다가 

콩알보다도 작은 난쟁이가 방동의 콧속에서 튀어나오더니

부지런히 바깥을 향해 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난쟁이는 곧 멀어져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두 명의 난쟁이는 손을 잡고 되돌아오더니 

땅에서 방동의 얼굴로 날아올라 콧속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은 마치 꿀벌이 벌집으로 날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들락날락하는 사이 이삼일이 지났다. 

그런데 또 왼쪽 난쟁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통로는 너무 구불구불해서 오가는 게 정말 불편하구나. 

차라리 우리끼리 문을 하나 만드는 것이 낫겠어.”

오른쪽 난쟁이가 그 말에 응수했다.


“내 쪽은 벽이 너무 두꺼워. 문을 뚫기가 쉽지 않겠는데.”


그러자 다시 왼쪽 난쟁이가 말했다.


“내가 먼저 시험 삼아 뚫어보지. 만약 성공하면 우리 둘이 함께 이 문을 사용하자.”


말이 끝나는 순간 방동은 눈두덩 안쪽에서 뭔가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시야가 활짝 트이며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너무나 기뻐 즉시 부인을 불러 그 사실을 전했다. 

그의 아내가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더니, 원래 시선을 가로막고 있던 백태가 찢어지며

조그만 구멍이 생겨나는 바람에 새까만 눈동자가 

마치 껍질 터진 산초 씨처럼 그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룻밤이 지나자 눈에 끼었던 허연 꺼풀은 모두 없어졌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한쪽 눈 안에 두 명의 난쟁이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 눈은 소라처럼 나선형으로 엉겨 붙은 꺼풀이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므로 방동 부부는 

그제야 두 난쟁이가 한 눈 속으로 살림을 합쳤음을 알 수 있었다. 


방동은 비록 한 눈밖에 볼 수 없는 애꾸눈이었지만 두 눈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눈이 밝았다. 

이런 일을 겪고 난 뒤부터 그는 한층 몸가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되어 

동네에서는 그의 품행을 칭찬하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이사씨(異史氏)는 말한다.


내 고향에 사는 어떤 선비가 친구 두 사람과 더불어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앞쪽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나귀를 타고 가는 것을 보자

장난기가 발동하여 시 한 구절을 읊조렸다.


“미인이 가는구나(有美人兮)!”


그는 또 두 친구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빨리 뛰게. 저 여자를 쫓아가자고!”


세 사람은 웃으면서 앞을 향해 달렸다. 

잠시 후 그들은 여자를 따라잡았는데, 

앞장서서 달리던 사람이 그녀를 쳐다보니 뜻밖에도 자기 며느리였다. 

그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두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의뭉을 떨며 외설스러운 언사로 

그 여자의 용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품평하기 시작했다. 

그 선비는 난처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마침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 여자는 내 큰며느리 되는 아이라네.”


모두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이 희극을 종결짓고 말았다.

남을 놀리려다 도리어 자신을 욕보이는 일이 흔히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한심한 부류라고 하겠다. 

방동 같은 사람은 그러다가 눈이 멀기에 이르렀으니, 

귀신이 그에게 내린 벌은 진정 참혹했던 것이다. 

그 수레에 탔던 부용성의 공주는 어떤 신이었을까? 

혹시 중생을 제도하려는 보살의 현신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난쟁이들이 있는 힘껏 문을 뚫어 방동이 다시 광명을 되찾은 것을 보면, 

귀신은 비록 경솔한 자를 미워하지만 사람의 개과천선을 막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부용성(芙蓉城) : 전설에 나오는 선경(仙境)의 하나.


광명경(光明經) : 불교 경전으로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약칭.


이사씨(異史氏) : ‘요재지이’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논찬(論贊) 형식. 

이사씨는 작자인 포송령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이 책의 많은 신기한 이야기들이 사서의 열전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이사(異史)’라고 말한 것이다.

본문 뒤에 ‘좌전(左傳)’의 ‘군자왈(君子曰)’이나

‘사기(史記)’의 ‘태사공왈(太史公曰)’ 같은 논찬 체제를 모방하여

‘이사씨왈’이라고 서두를 뗀 다음 작가가 직접 하고 싶은 말들을 덧붙이고 있다.


‘시경(詩經)’ ‘정풍·야유만초(鄭風·野有蔓草)’에 나오는 시구.)

Posted by 김허니브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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