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제갈성(諸葛城)에 상사우(商士禹)라는 선비가 살았다.

그는 술김에 농담하다가 그 지역 한 토호의 비위를 거스르게 되었다.

토호는 노예들을 사주하여 몰매를 가했고, 상사우는 집으로 들려 오자마자 곧 숨을 거두었다.

그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의 이름은 신(臣)이고 둘째 아들은 예(禮)라고 불렀다.

또 삼관(三官)이라는 딸도 하나 있었는데 당시 나이가 열여섯 살이었다.


본래 그녀는 시집갈 날을 잡은 상태였는데,

아버지가 갑작스레 변을 당하자 부득이 날짜를 뒤로 미루게 되었다.

두 오라비는 외지로 나가 재판을 걸었지만 그 해가 저물도록 결말은 나지 않았다.

상관의 시가에서는 사람을 보내 어머니를 뵙더니 

거상 기간 중이라도 혼인을 서두르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어머니가 그러자고 허락할 뜻을 비치자, 딸이 나서서 이치를 따졌다.


“아버님의 시신이 아직 식기도 전에 혼인을 하다니요? 그네들은 부모도 없답니까?”


약혼자의 집안에서는 그 말을 듣고 부끄러워하며 다시는 빨리 혼인하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얼마 뒤 두 오라비가 재판에 이기지 못하고 원통한 심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온 집안이 애통하여 들끓는 가운데,

두 형제는 부친의 시신을 그대로 둔 채 다시 또 소송 벌일 의논이 한창이었다.

삼관이 나서서 이를 만류했다.


“사람이 억울한 죽임을 당했어도 이치대로 처리되지 않으니,

세상일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장차 두 분 오빠들을 위해 염라대왕처럼 공정한 포청천을 내려주시려나 보지요.

아버님의 유해를 저대로 내버려 두고 어찌 마음이 놓이겠습니까?”


두 오라비는 누이동생의 말을 받아들여 부친을 안장했다.


장례를 마친 그날 밤 삼관은 한밤중에 집을 나가 종적을 감췄다.

어머니는 전전긍긍하며 행여 사위 집에서 그 사실을 알까 봐 

친척이나 친구들에게조차 말을 하지 못했다.

그저 두 아들을 채근하여 삼관의 행방을 찾으라고 은밀히 당부할 따름이었다.

거의 반년을 찾아 헤맸지만, 그녀는 종적이 묘연하여 끝내 소식이 없었다.


때마침 상사우를 죽인 토호가 생일을 맞아 광대들을 부르고 놀음판을 성대히 벌이게 되었다.

그날은 손순(孫淳)이란 광대가 제자 두 명을 데리고 와 일을 거들었다.

한 제자는 왕성(王成)인데 생김새는 평범했지만, 

목청이 꾀꼬리처럼 맑고 아름다워 여러 사람의 칭찬을 들었다.


다른 한 제자의 이름은 이옥(李玉)이었는데 용모가 예쁜 여자처럼 수려했다.

그에게 노래를 시켰더니 익숙하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사양했다.

그래도 억지로 강요하자, 그가 부르는 노래의 태반은 여염의 아낙네들이 즐기는 가요였다.

좌중의 모든 사람이 깔깔거리며 손뼉을 치니, 손순은 부끄러워하며 주인에게 아뢰었다.


“이 녀석은 저를 따라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저 술이나 따를 줄 압니다요.

부디 너무 허물치 마십시오.”


그 즉시 이옥에게는 술을 따르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그는 오락가락하며 술 시중을 들었는데 주인의 기색을 살피며 비위를 맞출 줄 알았다.

주인은 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술자리가 파하고 손님들이 흩어지자 주인은 이옥을 따로 남게 하고 더불어 잠자리에 들었다.

이옥은 주인을 대신하여 잠자리를 정돈하고 그의 신발을 벗기면서 빠짐없이 시중을 들었다.

주인이 음란한 언사로 희롱해도 그는 단지 빙그레 미소나 지을 뿐이었다.

주인은 그에게 홀딱 반했으므로 다른 하인은 모두 내보내고 이옥만 자리에 남겼다.

하인들이 모두 물러가자 이옥은 방문을 잠그고 빗장을 채웠다.

여러 종들은 다른 방으로 몰려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한참 뒤 방안에서 뭔가 꺽꺽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인 한 놈이 다가가 문틈으로 안쪽을 살폈지만, 방안은 칠흑같이 깜깜해서 보이는 것이 없었다.

하인이 막 몸을 돌이키려는 찰나, 갑자기 ‘꽝’ 하고 굉음이 울려 퍼졌다.

흡사 무거운 물건이 매달려 있다가 줄이 끊어져 바닥에 떨어질 때 나는 소리 같았다.

그는 황급히 안쪽을 향해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안에서는 전혀 응답이 없었다.

그가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아 문을 밀치고 들어갔더니,

주인은 몸뚱이와 머리가 두 동강이 난 상태였고

이옥은 목을 맸다가 새끼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땅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들보와 그의 목에는 제각기 끊어진 줄이 매어진 상태였다.

모두들 놀라 나자빠지다가 다급히 안채에 알려

집안 식구들을 모이게 했지만 무슨 영문인지는 아무도 알 길이 없었다.

모두들 이옥의 시체를 정원으로 옮겼다.

누군가 그의 신발을 잡았더니 물컹한 느낌이 흡사 발이 들지 않은 것 같았다.

신발을 벗겼더니 흰 헝겊이 씌워진 자그만 여자의 발이 드러났다.

사람들은 더욱 놀라면서 손순을 불러들여 어찌 된 일인지를 추궁했다.

손순은 두려워 대답할 바를 모르다가 다만 이렇게 변명했다.


“이옥은 달포 전에 저를 찾아와 제자가 된 자입니다.

주인님의 생신 잔치에 따라오고 싶어해 데려왔을 뿐,

어디 살던 누구인지는 저도 정말로 모른다니까요.”


상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녀가 상씨 집안에서 보낸 자객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다.
그들은 우선 두 명의 하인에게 시체를 지키라고 일렀다.
여자의 얼굴은 그때까지도 산 사람 같았고 몸에는 아직도 온기가 남아 있었다.
파수 보던 두 놈은 그녀를 겁탈하기로 은근슬쩍 합의했다.
한 놈이 시체를 붙들고 몸을 앞쪽으로 들이밀며
막 의복을 풀어헤치는 순간 갑자기 뭔가가 머리통을 후려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놈은 결국 입에서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까무러치게 놀란 다른 녀석은 서둘러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모두 그녀를 신처럼 공손히 모시는 한편 이 일을 관가에 신고했다.
관리가 상신과 상예를 심문하자, 형제는 이구동성으로 답변했다.

“모르는 일입니다. 다만 누이동생이 달아난 지 이미 반년이나 되긴 했습니다만.”

형제에게 시체를 살펴보게 했더니 과연 삼관이 틀림없었다.
관가에서는 그녀를 기특하게 여겨 시체를 두 오라비에게 내주고 매장토록 하였고
아울러 토호의 집안은 복수하지 말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사씨는 말한다.


집안에 여자 예양(豫讓)이 있는 줄도 몰랐다니 두 오라비가 어떤 사내였는지 알 만도 하다. 

하지만 삼관의 인품은 길게 노래를 읊조리며 

쓸쓸히 역수(易水)를 건너간 형가(荊軻)에 비겨도 무방할 것이다. 

강물도 그녀에게는 부끄러워 더 이상 흐르려 들지 않을 판인데, 

멍청하게 세속을 따라 부침하는 저 무능한 인간들임에랴! 

원컨대 온 천하의 여자들이 색실을 사 삼관의 초상을 수놓아 받들게 한다면, 

그 공덕은 필시 관우(關羽)를 모시는 것에 덜하지 않을 것이다.

Posted by 김허니브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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