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顧生)은 금릉(金陵·지금의 南京) 사람이다. 

그는 다방면으로 재능이 있었지만 집안이 몹시 가난했다. 

게다가 어머니마저 연로했기 때문에 차마 그 슬하를 떠날 수가 없어

날마다 사람들에게 글씨와 그림을 그려주고 약간의 푼돈을 사례비로 받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이러다 보니 고생은 나이가 스물다섯이나 되도록 장가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집 맞은편에는 본래부터 빈집이 한 채 있었다. 

언제부턴가 노파 한 사람과 젊은 여자 한 명이 그곳에 세 들어 살기 시작했지만 

여자들만 살고 남자가 없는 까닭에 고생은 그 집안 형편에 대해 물어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루는 고생이 밖에서 집으로 들어오다가 우연히 어떤 아가씨가 

어머니 방에서 나오는 광경을 목도했다. 

나이는 대략 열일곱 여덟 살쯤 되었는데, 수려하고 아담한 자태가 세상에 드문 미인이었다. 

그녀는 고생과 마주쳤어도 별로 피하는 기색이 아니었으나 분위기만큼은 매우 단정했다. 

안으로 들어간 고생이 어머니께 누구냐고 물었더니,


“그 애는 맞은편 집 아가씨인데 나한테 가위와 자를 빌리러 왔다. 

조금 아까 말로는 자기 집에도 홀어머니만 계시다고 하더구나. 

이 아가씨는 가난한 집 자식 같지가 않더라. 

왜 아직까지 출가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어머니가 늙어 돌봐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내일 가서 그 어머니를 만나보고 한번 넌지시 뜻을 비쳐 봐야겠다. 

만약 그들의 요구가 지나치게 높지만 않다면, 

네가 아가씨 대신 그 어머니를 봉양할 수도 있지 않겠니?”


하는 대답이었다. 


다음날 고생의 어머니는 아가씨 집으로 찾아갔는데, 알고 보니 그녀 어머니는 귀머거리 노파였다.

집안을 들여다보니 이틀 거리 양식조차 없는 가난한 살림이었다. 

무엇을 해서 먹고사는가 했더니 아가씨가 삯바느질을 한다는 것이었다. 

고생의 어머니가 빙빙 에둘러서 두 집안 살림을 합치면 어떻겠느냐는 의사를 비쳤더니, 

노파는 받아들일 듯한 기색으로 돌아앉아 딸과 상의했다. 

아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만은 매우 불쾌한 기색이었다. 

고생의 어머니는 하릴없이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가씨의 표정을 자세히 분석하면서 뭔가 알 수 없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아가씨가 우리 집이 너무 가난하다고 꺼려서일까? 사람됨이 말수도 적고 웃음도 없더라.

예쁘기는 복사꽃이나 배꽃과 같다만 서릿발처럼 차갑기만 하니, 정말로 이상한 아이야!”


두 모자는 미심쩍어하면서 한바탕 탄식하다가 없었던 일처럼 치부하기로 하였다. 

하루는 고생이 서재의 창가에 앉아 있는데, 어떤 소년이 찾아와서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소년의 생김새는 대단히 아름다웠지만, 기색은 자못 경망스러웠다. 

고생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더니,


“이웃 마을에 살아요.”


하는 대답이었다. 


그 후부터 소년은 이삼일마다 한 번씩 찾아왔다. 

차츰 친숙해져 서로 농담도 하고 놀려먹는 사이가 되었는데, 

고생이 품에 안고 애무를 해도 소년은 그다지 반항하지 않았다. 

그러다 둘은 마침내 사통하기에 이르렀고, 그로부터 더욱 친밀하게 왕래하는 사이가 되었다. 

한번은 이웃집 여자가 건너왔는데, 소년이 눈길을 보내며 고생에게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다.


“이웃집에 사는 아가씨야.”


고생의 대답에 소년이 토를 달았다.


“저렇듯 아름다운 여자가 표정은 왜 그리 무섭지요?”


잠시 후 고생이 안채로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말했다.


“방금 그 아가씨가 오더니 쌀을 좀 꾸어달라고 하면서 

밥을 지은 지가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고 말하더라. 

이 아가씨는 지극한 효녀인데 그토록 가난하다니 얼마나 불쌍하니? 

우리가 약간이나마 도와줘야겠구나.”


고생은 어머니의 말씀대로 쌀 한 말을 지고 그 집으로 찾아가 어머니의 뜻을 전달했다. 

아가씨는 쌀을 받으면서도 전혀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않았다. 

그 후로 아가씨는 고생의 집에 왔다가 어머니가 바느질하는 모습을 보기만 하면 

매번 대신해서 의복과 신발을 만들어 주었다. 

또 고생의 집안을 들락날락하며 마치 며느리라도 되는 양 집안일들을 보살폈다. 

고생은 더욱 그녀에게 감격하여 맛있는 음식이 생길 때마다 

반드시 아가씨의 어머니에게 나누어 보냈다. 

아가씨는 그래도 여전히 고맙다는 인사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한번은 고생 어머니의 음부에 종기가 나 밤낮으로 통증에 시달리며 울부짖게 되었다. 

아가씨는 수시로 찾아와 살펴보면서 상처를 씻고 약을 발라주었다. 

하루에 서너 번씩이나 그런 일이 반복되자 고생의 어머니는 몸 둘 바를 몰라 불안해했지만,

아가씨는 그 더러움에도 전혀 개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어머니는,


“아! 내가 어떻게 해야 너 같은 며느리를 얻어 이 늙은 몸이 죽을 때까지 봉양 받을 수 있을거나.”


라고 탄식하고는 슬프게 흐느껴 울었다.

아가씨가 그녀를 위로하면서 말했다.


“아드님이 지극한 효자이시니, 제가 홀어머니를 모시는 것보다 몇백 배나 낫겠지요!”


“이런 잡다한 병수발을 효자라고 어찌해낼 수가 있겠니?

게다가 나는 하루하루 늙어만 갈 뿐이니 언제 병들어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나는 정말 대를 잇지 못할 것 같다는 근심에 마음을 졸이고 있단다.”


고생의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동안, 아들이 방안에 들어왔다. 

어머니가 울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낭자에게 진실로 많은 빚을 졌다. 너는 그 은덕 갚을 것을 잊으면 안 될 것이야.”


고생이 엎드려서 아가씨에게 절을 하자 그녀는,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공경해 주셨지만 저는 고맙다는 인사를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저에게 굳이 고맙다고 인사할 필요가 있으세요?”


하는 반응이었다. 

이때부터 고생은 그녀를 더욱 경애하게 되었다. 

하지만 아가씨의 행동거지는 여전히 뻣뻣하기만 했고 조금도 틈을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아가씨가 고생의 집에 들렀다가 자기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일어섰다.

고생은 대문 밖으로 나가는 여자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생긋 웃음을 지었다. 

고생은 너무나 뜻밖이라 설레는 가슴을 안고 달려나가 그녀의 집까지 쫓아갔다. 

아가씨에게 수작을 걸었더니 그녀도 거절하는 기색이 없었으므로 두 사람은 서로 즐겁게 교합했다.

일이 다 끝나자 아가씨는 고생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이런 일은 한 번으로 그칠 뿐이에요. 절대로 두 번은 안 됩니다.”


고생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고생이 다시 아가씨와의 밀회를 약속하려 들자, 

그녀는 정색하며 돌아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아가씨는 날마다 고생의 집에 왔다. 

그녀는 고생과 수시로 마주쳤지만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일 뿐이었다.


한번은 그녀가 아무도 없는 곳에서 갑자기 고생에게 물었다.


“날마다 오는 그 소년이 누구지요?”


고생이 그에 관해 이야기했더니, 아가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놈의 행동이나 태도가 제게 무례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친밀한 벗이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었던 것이지요. 

그놈에게 이렇게 전해 주십시오.

 또다시 못된 짓을 하면, 놈이 살고 싶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겠다고요.”


그날 저녁나절, 고생은 소년에게 그 말을 전하면서 덧붙여 말했다.


“반드시 조심해. 그 여자에게는 무례하게 굴면 안 돼!”


“실례하면 안 된다는 여자와 당신은 어떻게 사통했지요?”


고생이 그런 일은 없다고 극구 발뺌을 하자, 소년이 다음과 같이 쏘아붙였다.


“만약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이런 외설스러운 이야기가 어떻게 당신 귀에 들어갈 수 있었겠어요?”


고생이 그 말에 아무 대답도 못 하자, 소년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제 말 또한 그 여자에게 전해 주시죠. 

정숙한 척 가장하지 말라고요. 

그렇지 않으면 내가 당신들의 일을 동네방네 소문낼 거예요.”


고생은 분노가 치밀어 낯빛이 달라졌고, 그것을 본 소년은 슬며시 물러가고 말았다.


어느 날 밤 고생이 고즈넉이 앉아 있을 때, 아가씨가 문득 찾아오더니 웃으면서 말했다.


“저와 당신의 연분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니, 이 어찌 운명이라 아니하겠습니까!”


고생은 뛸 듯이 기뻐하며 아가씨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때 별안간 짝짝 신발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황망히 몸을 일으켰지만, 소년은 벌써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고생이 놀라서 물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지?”


소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이 정숙한 아가씨를 구경하러 왔을 뿐이에요.”


그는 다시 아가씨를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오늘은 남을 탓하지 못하겠지?”


아가씨는 눈썹이 치켜 올라가고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재빨리 윗도리를 벗어젖혔다.

그러자 가죽 주머니가 하나 나타났는데, 

그녀가 안에서 잡아채듯 꺼낸 것은 바로 한 자 남짓한 날이 새파란 비수였다. 

소년은 그것을 보자 놀라 뒷걸음질 치며 달아났다. 

아가씨는 문밖까지 쫓아나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소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비수를 공중으로 내던지자 ‘캭’ 소리가 나면서 무지개 같은 빛이 길게 뻗치더니,

잠시 후 어떤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생이 얼른 등불을 비췄더니, 바로 머리와 몸통이 따로 떨어져 나간 한 마리의 백여우였다.

고생이 놀라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아가씨가 말했다.


“이놈이 바로 당신의 연동(童)입니다. 저는 본래 놓아줄 생각이었는데, 

제 놈이 굳이 죽겠다고 덤벼드는군요!”


말을 마치자 그녀는 비수를 거둬 다시 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고생이 아가씨를 끌어당기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더니 그녀는,


“이 요물 때문에 흥취가 모두 사그라들었으니 내일 밤을 기다리세요.”


라고 말하고는 문을 열고 그대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저녁 아가씨가 정말로 다시 찾아와 두 사람은 흠뻑 사랑에 도취할 수 있었다. 

고생이 아가씨에게 그런 능력이 어디서 생겨났느냐고 캐묻자,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이는 당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하는 사안이므로 만약 누설되면 당신에게 이로울 것이 없어요.”


고생이 또 그녀에게 서로 시집 장가드는 일을 상의하려고 했더니,


“당신과 잠자리도 같이했고 또 당신을 위해 물 긷고 밥을 지었으니,

제가 당신의 아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이미 부부인데 다시금 시집 장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는 대답이었다.


“당신, 우리 집이 가난한 게 싫어서 그러는 거요?”


“당신은 정말 가난하지요. 그렇다고 저는 부자입니까? 

오늘 밤 당신과 동침한 것은 당신의 가난이 애달파서 그런 거예요.”


헤어질 무렵, 그녀는 고생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런 구차한 행동은 자주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와야 할 때는 제가 알아서 올 테지만, 올 때가 아니라면 당신이 억지를 부려도 소용없어요.”


그 후로도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고생은 매번 그녀를 잡아끌며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아가씨는 번번이 달아나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그를 위해 바느질을 하고 식사를 준비해 주는 것은 다른 집 부인네들과 전혀 다른 바가 없었다.


몇 달이 지난 뒤, 아가씨의 어머니가 죽었다. 

고생은 있는 힘을 다해 장례를 치러주었고, 아가씨는 이때부터 혼자 살게 되었다. 

고생은 그녀가 집안에 혼자 있으므로 마음대로 할 수 있겠다 싶어 담장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여러 번 사람을 불렀지만 

끝내 아무 응답도 들려오지 않아 대문간을 쳐다보았더니, 

원래부터 안쪽에는 빗장도 걸려 있지 않았다. 

고생은 속으로 아가씨가 딴 남자를 만나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밤이 되어 다시 갔을 때도 여전히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 몸에 지니고 있던 패옥을 창문 틈에 올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루가 지났을 때, 고생은 어머니의 처소에서 아가씨와 다시 마주쳤다. 

그가 방에서 물러 나오자, 아가씨도 뒤따라 나오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저를 의심하시나요? 

사람마다 각자 걱정거리가 다른 법이라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그런 경우도 있게 마련이지요. 

인제 와서 당신의 의심을 없애려고 해봐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급한 일이 있어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겠어요.”


무슨 일이냐고 묻는 고생에게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저는 임신한 지가 벌써 여덟 달이나 되었기 때문에 조만간 아이를 낳을 것 같아요. 

저의 신분이 아직 분명치 않은 까닭에 당신을 위해 아이를 낳을 수는 있지만 기를 수는 없습니다. 

몰래 당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유모를 한 명 찾으세요, 

양자를 들였노라 가장하시면서. 절대로 제가 낳았다는 말은 하면 안 됩니다.”


고생이 그러마 허락하고 어머니께 이 사정을 말씀드리자, 그녀는 웃으면서 신기해했다.


“이 아가씨는 정말로 이상하구나! 

며느리로 들인다 할 때는 안 된다고 하더니 도리어 우리 아들과 사통하기를 원하다니 말야!”


그렇지만 어머니는 기쁨에 겨워 아가씨의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면서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다시 달포 가량이 지났다. 

아가씨가 며칠이나 나타나지 않자 어머니는 의구심이 들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대문은 꼭 닫혀 있었고 사방은 썰렁하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린 다음에야 아가씨가 비로소 

헝클어진 머리채에 때가 덕지덕지하게 엉망이 된 얼굴로 안에서 나왔다. 

그녀는 문을 열어 고생의 어머니를 안으로 들이더니 다시 대문에 빗장을 질렀다. 

어머니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자 뜻밖에도 갓난아이가 침상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낳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어머니가 놀라며 물었더니,


“사흘 되었어요.”


하는 대답이었다. 

강보를 들추고 살펴보니 사내아이였는데, 넓은 얼굴에 이마가 시원스러운 잘생긴 아이였다. 

고생의 어머니가 기뻐하면서 물었다.


“네가 이미 나를 위해 손자를 낳아주었다만, 

너는 의지할 데라곤 없는 혈혈단신인데 장차 누구에게 의탁하려는 것이냐?”


“제 구구한 속내를 어머님께 다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밤이 되어 인적이 드물어지면 아이를 안고 가셔도 괜찮아요.”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두 사람 모두 아가씨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밤이 되자 어머니는 그 집으로 건너가 아이를 안고 돌아왔다.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한밤중, 아가씨가 갑자기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가죽 주머니 하나를 들고 웃으면서 말했다.


“저의 큰일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어요.”


고생이 다급하게 무슨 까닭인지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봉양해 준 은덕을 저는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었답니다. 

지난번에 남녀 간의 일을 두고 한번은 괜찮아도 두 번은 안 된다고 말했던 이유도 

남녀 간의 잠자리에서 보은하려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가난해서 아내를 살 돈이 없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 대를 이을 아이를 낳아주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원래는 한 번만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뜻밖에도 달거리가 또다시 나타나더군요. 

그래서 결국 애초의 말을 어기고 다시 당신과 동침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미 당신의 은혜를 갚았고 저의 소원도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었소?”


“원수의 대가리입니다.”


그녀는 주머니를 치켜들어 안을 들여다보게 했는데, 

그 안에는 사람의 머리통 하나가 수염과 머리카락이 서로 뒤엉킨 상태로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깜짝 놀라며 다시 그렇게 된 사정을 캐묻는 고생에게 아가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이전에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도 

사실은 비밀이 지켜지지 않고 누설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일이 다 끝났으니 이야기해도 무방하겠지요. 

저는 절강 사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마(司馬) 벼슬을 지내셨는데 원수의 모함으로 돌아가셨고 

재산마저 죄다 몰수당했지요. 

저는 늙은 어머니를 업고 도망쳐 나와 이름을 감추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삼 년 동안 숨어서 살았습니다. 

즉시 복수하지 못한 까닭은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었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또 태아가 뱃속에서 꿈틀거려 다시 한동안이 지체되었습니다. 

예전에 한밤중에 밖에 나갔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원수의 집과 가는 길을 확실하게 몰라 행여라도 차질을 빚을까 봐 걱정되어 그랬던 거지요.”


그녀는 말을 마치고 대문 밖으로 나서다가 다시 고개를 돌리며 당부했다.


“제가 낳은 아이를 잘 보살펴주십시오. 

당신은 박복한 데다 수명도 길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가 당신 가문을 빛나게 할 것입니다. 

밤이 깊었으니 늙은 어머님을 깨워 놀라시게 할 수는 없겠지요. 저는 이만 떠나요!”


고생이 쓰라린 심정으로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려는 순간, 

아가씨는 번개처럼 몸을 돌려 눈 깜짝할 새 사라져버렸다. 

고생은 마치 넋 나간 사람처럼 탄식하며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튿날 그는 어머니에게 그 이야기를 전했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면서 그 기이함에 탄식할 따름이었다. 


삼 년 후 과연 고생이 죽었다. 

그의 아들은 열여덟 살에 진사가 되었는데, 할머니가 천수를 누릴 때까지 줄곧 봉양했다고 한다.



이사씨는 말한다.

사람은 반드시 집안에 협녀가 있어야만 연동을 두어도 탈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사랑하는 수컷이 당신의 암컷을 좋아해서 넘보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 : 연동: 여성처럼 취급하며 데리고 희롱하는 소년. 

연동은 본래 예쁜 아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남색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Posted by 김허니브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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