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東海)상의 고적도(古迹島)에는 

오색이 찬란한 내동화(耐冬花)란 꽃이 피는데 사철 시들지도 않는다. 

섬에는 원래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고 인적 또한 드문 편이었다.

등주(登州)에 사는 장생(張生)은 원래 호기심이 많은 데다 

노는 것 또한 남에게 뒤질세라 부지런히 쫓아다니는 성격이었다. 

그는 고적도의 경관이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자 

술과 음식을 장만하여 혼자 쪽배를 타고 그곳으로 건너갔다.


섬에 올라서니 마침 꽃들이 만발하여 몇 리 밖까지 향기가 퍼져나가는 중이었고 

굵기가 십여 아름이나 되는 나무들도 여기저기 우거져 있었다. 

장생은 경관에 취해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오락가락하다가 

술병을 따 혼자서 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자니 동반자가 없는 것이 못내 아쉽게 느껴지는 것이었다.


문득 꽃밭 사이에서 한 아름다운 여인이 

다홍치마를 눈부시게 펄럭이며 걸어 나오는데 세상에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그녀는 장생을 보더니 웃으면서 말을 걸었다.


“오늘따라 어쩐지 느낌이 예사롭지 않더라니, 

저랑 똑같은 취미를 가진 분이 먼저 와 계실 줄은 몰랐네요.”


장생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누구냐고 물었다.


“저는 교주(膠州)의 기생입니다. 

조금 전 해공자(海公子)를 따라 이곳에 왔지요. 

그 사람은 좋은 경치를 찾아 여기저기 훨훨 나도는 중이지만 

저는 다리가 아파 잠시 이곳에 눌러앉았던 참이랍니다.”


장생은 외롭고 적적하던 차에 미인과 어울리게 되자 

좋아라 그녀를 끌어앉히고 함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여인의 말씨는 부드럽고 우아하여 사람의 혼백을 요동치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으므로 

장생의 마음은 순식간에 그녀에게 기울어갔다. 

해공자가 나타나면 즐거움도 끝이라는 걱정이 든 그는 여자를 끌어안으며 교합을 요구했다.

여자도 기다렸다는 듯 흔연히 그에게 몸을 맡겼다.

두 사람의 흥이 한창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무렵,

갑자기 바람 소리가 들리면서 초목이 뭔가에 깔려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순간 여자는 황급히 장생을 밀치며 몸을 일으켰다.


“해공자가 왔어요.”


장생이 엉거주춤 옷차림을 추스르다가 돌아보니 여자는 벌써 어디로 갔는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이어 몸뚱이가 술통보다 굵은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기어 나왔다.

장생은 혼비백산하여 등 뒤의 거목 사이로 몸을 숨기며 뱀이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기만 바랐다.

하지만 구렁이는 그의 앞쪽 가까이 다가오더니 몸뚱이로 사람과 나무를 몇 바퀴나 친친 동여 감았다. 장생의 두 팔은 그 자신의 허벅지 사이에 꼭 끼여버려 옴짝달싹할 수조차 없었다.

뱀이 고개를 위쪽으로 치켜들어 혓바닥으로 장생의 코를 찌르자 코피가 주르륵 아래로 쏟아졌다. 

바닥으로 흐른 피가 웅덩이처럼 고이자 뱀은 대가리를 굽혀 그것을 들이마셨다.


이제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하던 장생은

문득 허리춤에 찬 염낭 속에 여우 사냥 때 쓰는 독약이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는 손가락 두 개를 꼼지락거려 주머니를 간신히 끄집어냈고

바로 봉지를 뜯은 뒤 약가루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또 고개를 손바닥 쪽으로 비튼 뒤 핏방울을 약가루 위에 떨어뜨렸다. 

잠깐 사이 피가 한주먹이나 고이자 뱀은 과연 대가리를 손바닥 쪽으로 옮기고 그 피를 핥아 먹었다. 

하지만 미처 다 마시기도 전에 몸뚱이가 스르륵 풀리더니 

흡사 벼락 때리듯 나무둥치에 꼬리를 휘둘렀다. 

그 충격으로 둥치는 반 동강이나 부러져 나갔고 

뱀은 대들보가 무너지듯 땅바닥에 널브러져 뻗어버렸다.


장생은 머리가 어지럽고 눈앞이 노래져서 몸을 일으키지 못하다가 

한나절이나 지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그는 뱀을 배에다 싣고 돌아간 뒤 달포가 넘도록 중병을 앓았다. 

그제사 생각하니 교주의 기생이란 여자도 뱀의 화신이었을 거란 의심이 들었다.

Posted by 김허니브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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