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대업(洪大業)은 서울 사람이다. 

그의 아내 주 씨(朱氏)는 자색이 몹시 고운 여자였는데 부부의 금실도 매우 좋았다. 

나중에 홍 씨는 계집종 보대(寶帶)를 첩으로 들였다. 

그런데 보대는 용모가 주 씨보다 훨씬 떨어지는데도 홍 씨는 유독 보대만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주 씨는 이것이 불만스러워 매사에 남편과 반목하여 집안에는 말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홍 씨는 드러내고 첩의 방에서 자지는 않았지만 

더욱 보대를 총애하게 되어 주 씨와의 관계는 갈수록 소원해졌다.


훗날 그들은 이사를 해서 적씨(狄氏) 성을 가진 비단장수와 이웃하여 살게 되었다. 

적씨의 처인 항랑(恒娘)은 자기가 먼저 건너와 주 씨에게 안부 인사를 전했다. 

그녀는 서른을 좀 넘긴 나이였는데 용모는 수수했지만 

말하는 품이 매우 경쾌하고 달변이어서 주 씨는 단박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다음날은 주씨가 답방을 갔다. 

보아하니 그 집에도 나이가 스물쯤 되는 어린 첩이 있었는데 생김새가 매우 귀엽고 예뻤다. 

그들은 거의 반년을 이웃하여 살았지만 적씨네 집에서는 

욕하고 꾸짖는 소리가 한 번도 담장을 넘어온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적씨는 유독 항랑만을 아끼고 사랑하여 첩은 단지 이름만 걸어놓은 존재일 뿐이었다.


하루는 주씨가 항랑에게 물었다.


“저는 줄곧 남편이 첩을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첩이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아내라는 명분을 바꿔 첩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왔지요. 

그런데 당신네 집을 보니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겠어요. 

부인은 대체 무슨 수단을 쓰시나요? 

만약 그 방법을 전수받을 수만 있다면 당신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항랑은 그 말을 듣고 핀잔부터 날렸다.


“아유, 당신 자신이 남편을 멀어지게 해놓고 도리어 사내를 탓하시다뇨?

당신처럼 아침저녁으로 끊임없이 잔소리하면, 

이는 수풀 속으로 참새를 몰아넣는 것처럼 

남자의 마음을 당신에게서 더욱 멀어지게만 할 따름입니다.

집으로 돌아가면 남편이 얼마든지 보대를 가까이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세요. 

설사 남편이 제 발로 당신을 찾아오더라도 절대로 방 안에 들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면 당신에게 또 방법을 생각해 드리지요.”


주 씨는 항랑의 말대로 보대를 더욱 예쁘게 단장시켜 남편의 잠자리 시중을 들게 하였다. 

또 홍씨가 무엇을 먹고 마시든 간에 항상 보대와 함께 있도록 조처했다.

홍씨가 어쩌다 한 번씩은 주 씨를 기웃거렸지만,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남편을 거절하기에 바빴다. 

그러자 집안 식구들은 모두 입을 모아 주 씨의 부덕을 칭송하게 되었다.


이렇게 달포쯤 지내고 나서 주 씨는 다시 항랑을 찾아갔다. 

그녀는 주 씨의 이야기를 듣고 나자 몹시 흐뭇해하면서 또 다른 지시를 내렸다.


“됐어요! 이제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더 이상 치장하지 마세요. 

화려한 옷은 입지 말고 연지나 분도 바르면 안 됩니다. 

얼굴을 더럽게 하고 다 떨어진 신발을 신은 채 하인들과 어울려 집안일을 하세요. 

그렇게 한 달이 지나면 다시 저에게 오십시오.”


주 씨는 집으로 돌아와 모든 일을 항랑이 시킨 대로 하였다. 

누덕누덕 기운 옷을 입고 더러워진 얼굴은 일부러 씻지 않고 내버려 두면서

날마다 길쌈에만 열심일 뿐 다른 일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홍대업이 그녀를 안쓰러워하며 보대에게 집안일을 분담시키려 하자, 

주 씨는 받아들이지 않고 번번이 그녀를 나무라며 바깥으로 내보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나 주씨가 다시 항랑을 만나러 갔더니, 

그녀는 입에 침이 마르게 주 씨를 칭찬했다.


“당신은 정말 가르칠 맛이 나는 학생이로군요. 

모레는 상사절(上巳節)이니 당신을 초대해 봄동산으로 답청(踏靑)놀이를 가고 싶네요. 

그날은 해진 옷을 죄다 벗어버리고 옷이고 버선이고 신발이고 간에 

모두 새것으로 뽑아 입은 다음 일찌감치 저한테 건너오십시오.”


주 씨는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러지요!”


상사절 아침, 주 씨는 거울 앞에서 정성 들여 화장하고 모든 것을 항랑이 일러준 대로 시행했다. 

단장이 끝난 다음 항랑에게 건너갔더니, 그녀는 주 씨를 보고 기뻐하여 마지않았다.


“좋아요!”


항랑은 다시 주 씨를 대신하여 머리형을 봉황새 꼬리 모양으로 말아 올려주었는데, 

반들반들한 주 씨의 머릿결은 사람의 그림자까지도 비출 지경이었다. 

항랑은 옷소매가 유행에 맞지 않는다면서 소매 선을 잘라내 다시 바느질해 주었고, 

또 신발 모양이 너무 투박하다고 탓하더니 대나무 상자 안에서 

짓고 있던 신발을 꺼내 주 씨와 함께 완성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춰지자 항랑은 주 씨에게 새로 옷을 갈아입게 하였다. 

헤어질 즈음 항랑은 주 씨에게 술을 권하며 당부했다.


“집으로 돌아가 남편과 마주치게 되면 즉시 문을 닫아걸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드십시오. 

그가 와서 문을 두드리더라도 절대로 방 안에 들이면 안 됩니다. 

세 번 정도 찾아오면 한 번만 받아들이세요. 

그가 당신에게 입맞춤하고 당신의 발을 주무르더라도 

계속 쌀쌀맞게 굴면서 기분 좋게 해주지 말아요. 

그렇게 반달쯤 지나면 다시 저를 찾아오십시오.”


주씨가 집으로 돌아가 현란한 차림새로 홍대업의 앞에 나타나자,

그는 자기 아내를 위아래로 뚫어지게 쳐다보며 평소와는 다른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주 씨는 놀러갔던 이야기를 잠깐 하고 손으로 턱을 고이며 피곤하다는 시늉을 했다. 

그러고는 날도 저물지 않았는데 몸을 일으켜 자기 방으로 들어간 뒤 문을 잠그고 잠자기 시작했다.


얼마 후 과연 홍대업이 찾아와 방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주씨가 침상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하릴없이 돌아서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 날 저녁도 똑같은 상황이 재연되었다. 

그 이튿날 홍대업이 주 씨를 나무라며 까닭을 묻자, 그녀는 이렇게 응수했다.


“혼자 자는 게 이미 습관이 되어서요. 

당신이 또다시 저를 성가시게 굴면 감당하지 못할 것만 같아요.”


그날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부터 홍대업이 안방 차지를 하고 앉아 

아내를 기다리더니 주씨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얼른 등불을 끄고 그녀를 침상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마치 새색시를 다루듯 조심스럽게 어루만지며 그녀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다. 

홍대업이 다음날 밤 다시 오겠다고 하자, 

주 씨는 늘 이러면 안 된다고 버티다가 결국은 사흘에 한 번씩으로 약속을 정하게 되었다.

그렇게 반달이 지나 주씨가 다시 항랑을 찾아가자, 

그녀는 방문을 잠그고 목소리를 낮추어 이야기했다.


“이제부터는 당신 혼자서 사내를 독점할 수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예쁘기는 하지만 요염하지가 않아요. 

당신의 자색으로 요염할 수만 있다면 서시(西施)라도 누를 수가 있을 텐데, 

하물며 그보다 못한 사람이야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항랑은 주 씨에게 눈을 흘겨보라고 하더니,


“그게 아니에요! 바깥 눈초리를 그렇게 뜨면 안 되죠.”


하고 지적했다. 


또 그녀에게 웃어보라고 한 뒤,


“틀렸어요! 왼편 뺨에 문제가 있어요.”


라고 말하며 자기가 직접 교태를 담아 추파를 던지는 모양을 시범으로 지어 보였다. 


또 눈처럼 하얀 이빨을 살짝 드러내며 미소 짓는 모습을 보여주더니 

주 씨에게 그대로 흉내 내게 하였다. 

주 씨는 수십 번을 연습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항랑과 비슷해질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항랑이 일렀다.


“이제는 돌아가세요! 집에 가서도 거울을 붙들고 익숙해질 때까지 연습해야만 합니다. 

이 밖에 더 이상의 비결은 없답니다. 

잠자리에 들어서의 일은 상황에 따라 움직이시되 

남편이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을 그때마다 던져주세요. 

하기야 이런 일은 말로 전수할 수 있는 바가 아니지요.”


주 씨는 집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항랑이 가르쳐준 대로 시행했다.


홍대업은 더욱 흥분하면서 주 씨에게 푹 빠진 나머지 

아내의 방에 들어가지 못할까 봐 항상 전전긍긍이었다. 

해가 저물기만 하면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홍대업은 안방에서 한 발짝도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날마다 되풀이되더니 홍대업은 결국 밀어내도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주 씨는 그럴수록 보대에게 더욱 잘해 주면서 

방안에서 술자리를 벌일 때마다 불러와 한자리에 참석시켰다. 

그렇지만 홍대업의 눈에는 갈수록 보대가 더 못나 보였으므로 

자리가 파하기도 전에 그녀를 내보내는 일이 종종 생겨났다.


한번은 주씨가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여 보대의 방에 들어가게 한 다음 

바깥에서 자물쇠를 채워버렸는데, 홍대업은 보대의 몸에 밤새도록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보대 역시 홍대업을 미워하게 되어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그를 욕하고 원망했다. 

홍대업은 갈수록 보대에게 싫증이 나 점차 매질까지 하게 되었고, 

그녀는 나름대로 분통을 터뜨리며 자신을 가꾸는 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더럽고 다 떨어진 신발을 걸치고 쑥대처럼 아무렇게나 뻗친 머리를 보면

더 이상 그녀를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하루는 항랑이 주 씨에게 물었다.


“내 방법이 어떠하던가요?”


“당신의 수단은 그야말로 절묘하기 이를 데 없었어요. 

그러나 이 제자는 시키는 대로 따라는 했어도 그 안에 담긴 뜻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더군요.

남편을 내버려 두란 말씀은 대체 무슨 뜻이었습니까?”


주 씨의 질문에 항랑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그대는 이런 말을 들어보지 못하셨나요? 

사람의 정리란 낡은 것을 싫어하고 새것을 좋아하며, 

손안에 넣기 어려운 것은 보물처럼 알고 얻기 쉬운 것은 경시하게 마련이란 이야기 말이에요. 

남편이 첩을 사랑하는 것은 그녀가 꼭 예뻐서라기보다는 

이제 막 그녀를 손안에 넣었다는 사실이 흥겹고 

어렵사리 첩과 한자리에 있게 된 상황에 흥분해서 그러는 것입니다. 

내버려 두고 실컷 먹게 하면 산해진미라도 물리기 마련인데 

맛도 없는 나물국이야 말할 나위 있겠어요?”


“화장을 지운 뒤 다시 화려하게 단장하게 만든 것은 무슨 이유인가요?”


“한쪽에 방치해 두고 눈여겨보지 않으면 오랫동안 헤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다 문득 아름답게 단장한 모습을 대하면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신선한 느낌이 드는 법입니다. 

예컨대 가난뱅이가 별안간 좋은 음식을 포식한 뒤 

예전에 먹던 겨 밥을 대하면 입맛이 당기지 않는 거나 매한가지 이치겠지요. 

또 쉽사리 몸을 허락하지 않다 보니 첩은 헌 사람이 되고 나는 새사람이 되며,

그녀는 쉽고 나는 어려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당신이 말한 아내가 첩이 될 수 있는 방법이랍니다.”


주 씨는 이야기를 듣고 매우 기뻐하다가 드디어는 서로 비밀이 없는 안방 친구가 되었다.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항랑이 돌연 주 씨에게 말했다.


“우리 두 사람의 정은 한 몸이나 다름없으니 당신에게 나의 신세를 숨기는 것은 도리가 아니겠지요. 사실은 저번부터 말하려고 했지만 당신이 놀랄까 봐 차마 그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곧 헤어질 마당이고 보니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저는 본래 여우랍니다. 

어려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못된 계모가 들어오는 바람에 서울까지 팔려오게 되었죠. 

다행히도 남편이 제게 잘해 주셔서 차마 그 곁을 떠나지 못하고 

오늘까지 차일피일 미뤄왔던 것입니다.

내일은 친정 아버님이 시해(尸解)에 드시는 날입니다. 

이번에 친정에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예요.”


주 씨는 항랑의 손을 붙들고 흐느껴 울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항랑의 집에 건너갔더니, 

온 집안 사람들이 놀라 허둥대는 가운데 항랑의 자취는 이미 온데간데없었다.



이사씨는 말한다.

구슬을 사면서 알맹이는 귀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담았던 상자만을 보배로 여긴 어리석은 사람이 있었다.

새것과 헌것, 어려운 것과 쉬운 것 사이에 얽힌 심리는

천만년이 지나도 풀지 못할 의혹이려니와, 

미움이 변하여 사랑이 되게 하는 수단은 바로 그런 마음에 대고 시행해야 효과가 나타난다. 

옛날의 간신배들은 임금을 섬길 적에 사람을 못 만나게 하고 책을 읽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를 보면, 지위를 유지하고 총애를 공고히 하려는 이들은 

모두 남의 속을 꿰뚫어 보는 비결을 간직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 상사절(上巳節) : 사대부집 부녀자들이 봄동산에 소풍 나가는 날. 

한대(漢代) 이전에는 음력 삼월 상사일(上巳日)이었지만, 

위(魏)나라 이후로는 삼월 초사흘을 가리키게 되었다. 

이때는 봄풀들이 새로 돋아나는 절기이기 때문에 그날의 외출을 ‘답청(踏靑)’이라고 불렀다.


시해(尸解):도가에서는 도를 닦은 사람이 죽으면 육체만 인간 세상에 남아 있고 

혼백은 날아가 신선이 된다고 여기는데, 이를 ‘시해’라고 부른다. 

왕충(王充)의 ‘논형(論衡)’ 도허(道虛)편에 나오는 말이다.)

Posted by 김허니브레드

블로그 이미지
괴담무단번역용 블로그입니다
김허니브레드

달력

 « |  » 2024.5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최근에 받은 트랙백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