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長安) 땅에 방동(方棟)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다. 

그는 지역 사회에 상당히 재주 있다고 알려진 명사였지만 사람됨이 경박하고 예절을 지킬 줄 몰랐다. 

들길을 걷거나 들판에서 노니는 여자라도 만나게 되면 언제나 히죽거리며 그 뒤를 따라다니곤 하였다.


청명절 하루 전날이었다. 

방동은 우연히 교외로 나갔다가 깜찍하고 귀여운 수레 한 대를 보았다. 

수레에는 붉은색의 수놓은 휘장이 처져 있었고, 

말을 탄 시녀 몇 명이 수레 뒤편에서 천천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중의 한 시녀는 조그만 망아지를 타고 있었는데 유별나게 예뻤으므로

방동은 좀 더 자세히 보려고 슬금슬금 그쪽으로 다가갔다.

갑자기 수레의 휘장이 젖혀지면서 안쪽에 앉아 있던 한 묘령의 여자가 드러났다. 

곱게 단장한 그녀는 방동이 여태까지 살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는 눈앞이 어지러웠고 혼백이 날아갈 것만 같았다. 

방동은 여자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계속 수레를 따라갔다. 

그렇게 몇 리 길을 가다가 문득 수레 안의 여자가 시녀를 가까이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


“날 위해 휘장을 쳐다오. 

어디서 굴러왔는지 알 수 없는 건방진 녀석이 끊임없이 나를 훔쳐보고 있구나!”


시녀는 명령대로 휘장을 내리더니, 화가 나 방동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이분은 부용성(芙蓉城) 일곱째 서방님이 새로 맞은 마님이신데 

친정으로 부모님을 뵈러 가는 길이시다. 

보통 농가의 부녀자가 아니시니, 어찌 너 따위 수재가 함부로 넘겨볼 수 있더란 말이냐!”


말을 마치자 그녀는 수레가 지나간 바퀴 자국에서 흙을 한 줌 집더니 방동을 향해서 뿌렸다. 

방동은 삽시간에 눈꺼풀이 감기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가 눈을 비비는 동안 수레와 말들은 멀리 사라져갔고, 그 후 다시는 볼 수가 없었다.

그는 한편 놀라고 또 의아하게 여기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눈이 계속 불편하기에 사람을 시켜 눈꺼풀을 뒤집어 살펴보게 했더니, 

눈동자 위에 조그맣게 백태가 끼어 있다고 하였다. 

하룻밤이 지나자 눈병은 더 심해져서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백태는 점점 커지더니 며칠 만에 동전만 한 두께로 자라났다. 

오른쪽 눈에는 또 나선형의 두꺼운 꺼풀이 자라났는데 양쪽 다 어떤 약을 써도 효험이 없었다. 

그는 초조하고 걱정이 되어 죽고만 싶었고 차츰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게 되었다.


누군가 ‘광명경(光明經)’을 읽으면 재난이 사라진다고 말하는 것을 듣게 되자, 

그는 즉시 한 권을 구해서 다른 사람에게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처음에는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었으나 

차츰 시일이 흐르면서 마음도 서서히 안정되어 갔다. 

그는 아무 할 일이 없었으므로 날마다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염주를 굴리며 불경을 외웠다. 

이렇게 일 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사이, 그는 온갖 잡념이 다 가라앉아 평온한 심정이 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왼편 눈 속에서 파리가 왱왱거리는 듯이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는 칠흑처럼 깜깜해. 도대체 숨 막혀 죽을 것만 같아!”


그러자 오른편 눈 속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 함께 나가서 돌아다니면 이 답답한 기분이 나아질 거야.”


방동은 마치 조그만 벌레가 꿈틀거리기라도 하는 양 

서서히 콧속이 가려워지면서 무언가 콧구멍 안쪽에서 기어 나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이 지나자 그 물체는 다시 콧속으로 돌아왔고, 

또 콧구멍에서 눈동자 쪽으로 움직여갔다. 

그들은 눈 속으로 되돌아오자 또다시 속삭였다.


“오랫동안 정원에 나가 보지 않았더니 어느 사이 진주란(珍珠蘭)이 말라 죽었어!”


방동은 원래부터 난초를 좋아해서 

정원에 여러 품종을 심어두고 날마다 직접 물을 주며 가꾸는 취미가 있었다. 

하지만 두 눈이 멀게 된 이후로는 난초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진주란이 말라 죽었다는 말을 듣자 당장 부인을 불러 물어보았다.


“어쩌다 뜰 안의 진주란을 말라 죽게 했소?”


부인은 그에게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고, 

방동은 눈 속에서 누군가가 그렇게 말하더라고 일러주었다. 

부인이 정원으로 달려가 살펴보니 

난초꽃이 정말로 시들어 죽어 있었으므로 별 이상한 일도 다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어찌 된 영문인지 알아보려고 방 안에 숨어 열심히 동정을 살피다가 

콩알보다도 작은 난쟁이가 방동의 콧속에서 튀어나오더니

부지런히 바깥을 향해 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난쟁이는 곧 멀어져서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 후 두 명의 난쟁이는 손을 잡고 되돌아오더니 

땅에서 방동의 얼굴로 날아올라 콧속으로 들어갔다. 

그 광경은 마치 꿀벌이 벌집으로 날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들락날락하는 사이 이삼일이 지났다. 

그런데 또 왼쪽 난쟁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통로는 너무 구불구불해서 오가는 게 정말 불편하구나. 

차라리 우리끼리 문을 하나 만드는 것이 낫겠어.”

오른쪽 난쟁이가 그 말에 응수했다.


“내 쪽은 벽이 너무 두꺼워. 문을 뚫기가 쉽지 않겠는데.”


그러자 다시 왼쪽 난쟁이가 말했다.


“내가 먼저 시험 삼아 뚫어보지. 만약 성공하면 우리 둘이 함께 이 문을 사용하자.”


말이 끝나는 순간 방동은 눈두덩 안쪽에서 뭔가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자 시야가 활짝 트이며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는 너무나 기뻐 즉시 부인을 불러 그 사실을 전했다. 

그의 아내가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더니, 원래 시선을 가로막고 있던 백태가 찢어지며

조그만 구멍이 생겨나는 바람에 새까만 눈동자가 

마치 껍질 터진 산초 씨처럼 그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하룻밤이 지나자 눈에 끼었던 허연 꺼풀은 모두 없어졌다.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한쪽 눈 안에 두 명의 난쟁이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하지만 오른쪽 눈은 소라처럼 나선형으로 엉겨 붙은 꺼풀이 

변함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므로 방동 부부는 

그제야 두 난쟁이가 한 눈 속으로 살림을 합쳤음을 알 수 있었다. 


방동은 비록 한 눈밖에 볼 수 없는 애꾸눈이었지만 두 눈을 가진 사람보다 훨씬 눈이 밝았다. 

이런 일을 겪고 난 뒤부터 그는 한층 몸가짐과 행동을 조심하게 되어 

동네에서는 그의 품행을 칭찬하는 소리가 드높게 되었다.



이사씨(異史氏)는 말한다.


내 고향에 사는 어떤 선비가 친구 두 사람과 더불어 길을 가고 있었다. 

그는 앞쪽에서 어떤 젊은 여자가 나귀를 타고 가는 것을 보자

장난기가 발동하여 시 한 구절을 읊조렸다.


“미인이 가는구나(有美人兮)!”


그는 또 두 친구를 돌아보며 재촉했다.


“빨리 뛰게. 저 여자를 쫓아가자고!”


세 사람은 웃으면서 앞을 향해 달렸다. 

잠시 후 그들은 여자를 따라잡았는데, 

앞장서서 달리던 사람이 그녀를 쳐다보니 뜻밖에도 자기 며느리였다. 

그는 부끄러움에 얼굴이 파랗게 질리면서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두 친구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의뭉을 떨며 외설스러운 언사로 

그 여자의 용모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품평하기 시작했다. 

그 선비는 난처해서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마침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 여자는 내 큰며느리 되는 아이라네.”


모두 속으로 웃음을 참지 못하면서 이 희극을 종결짓고 말았다.

남을 놀리려다 도리어 자신을 욕보이는 일이 흔히 있는데,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정말 한심한 부류라고 하겠다. 

방동 같은 사람은 그러다가 눈이 멀기에 이르렀으니, 

귀신이 그에게 내린 벌은 진정 참혹했던 것이다. 

그 수레에 탔던 부용성의 공주는 어떤 신이었을까? 

혹시 중생을 제도하려는 보살의 현신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난쟁이들이 있는 힘껏 문을 뚫어 방동이 다시 광명을 되찾은 것을 보면, 

귀신은 비록 경솔한 자를 미워하지만 사람의 개과천선을 막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 부용성(芙蓉城) : 전설에 나오는 선경(仙境)의 하나.


광명경(光明經) : 불교 경전으로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약칭.


이사씨(異史氏) : ‘요재지이’에서 사용하는 일종의 논찬(論贊) 형식. 

이사씨는 작자인 포송령 자신을 지칭하는 말로, 

이 책의 많은 신기한 이야기들이 사서의 열전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이사(異史)’라고 말한 것이다.

본문 뒤에 ‘좌전(左傳)’의 ‘군자왈(君子曰)’이나

‘사기(史記)’의 ‘태사공왈(太史公曰)’ 같은 논찬 체제를 모방하여

‘이사씨왈’이라고 서두를 뗀 다음 작가가 직접 하고 싶은 말들을 덧붙이고 있다.


‘시경(詩經)’ ‘정풍·야유만초(鄭風·野有蔓草)’에 나오는 시구.)

Posted by 김허니브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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