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도둑질(偷桃ㆍ투도)
소년 시절 나는 동자 시에 참가하려고 제남부에 간 적이 있었다.
마침 입춘 무렵이었다.
관례에 따라 그곳에서는 하루 전날 각양각색의 상인들이 모여들어
단청으로 곱게 장식한 누각을 세우고
악대를 앞세워 번사로 행진하는 축하 놀이마당을 벌였다.
행사의 명칭은 '봄맞이'였고, 나는 친구 따라 구경꾼들 틈에 끼어 놀이판을 감상했다.
이날은 구경나온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발 디딜 틈조차 없었는데,
대청에는 온통 붉은 옷차림의 관리 네 명이 동서로 마주 앉아 있었다.
그 당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철부지였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관리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저 시끌벅적한 인파에 휩쓸리며 귓전을 때리는 북소리에 정신이 어지러울 따름이었다.
문득 어떤 사람이 더벅머리 사내아이를 데리고 멜대를 멘 채
앞으로 나아가더니 대청 위에 뭐라고 아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온갖 잡스러운 소음이 한꺼번에 들끓는 중이라 무슨 말을 하는지는 또한 들리지 않았다.
오직 대청 위에 늘어앉은 관리들이 너털웃음 터뜨리는 모습만이 보일 따름이었다.
이어 푸른 옷을 입은 아전이 큰소리로 마술판을 벌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사람은 명을 받들겠다는 시늉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아전에게 물었다.
"무슨 판을 벌일 깝쇼?"
아전은 대청 위로 쪼르르 올라가 관리들과 서너 마디 주고받더니
다시 아래로 내려와 마술사에게 가장 잘하는 장기가 무엇인지 물었다.
"저는 계절을 바꿔 식물이 자라게 할 수 있구먼요."
아전은 이 말을 관리에게 고했다.
잠시 뒤 아전이 다시 아래로 내려와 복숭아를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마술사는 선선히 응낙했다.
이어 그는 옷을 벗어 대나무 궤짝 위를 가리더니 짐짓 원망하는 자태로 소리쳤다.
"나으리도 참 너무하십니다그려!
꽁꽁 얼어붙은 얼음이 채 녹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복숭아를 대령한단 말입니까?
안 가져오면 또 어르신의 노여움을 탈 테죠. 이 노릇을 어쩌면 좋담!"
그의 아들이 말참견을 하며 끼어들었다.
"아버지가 벌써 대답을 하셨으니 또 무슨 수로 몸을 빼실려우?"
마술사는 상심한 표정으로 한참을 머뭇대더니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춘설이 깔린 초봄에 인간 세상 어디에 복숭아를 찾는단 말이냐?
다만 서왕모의 과수원은 사시사철 잎이 떨어지지 않으니
그곳이라면 혹 복숭아가 나올지도 모르겠구나.
천상에 올라가 훔쳐오는 것만이 방법이겠다."
"아이구! 하늘이 사다리 타고 올라갈 수 있는 그런 동네랍니까?"
"다 방법이 있지."
마술사는 곧 궤짝을 열더니 십여 길도 넘을 성싶은 새끼줄 한 뭉치를 꺼냈다.
그가 끄트머리를 잡고 공중을 향해 힘껏 내던지자
새끼줄은 뭔가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당장 허공에서 아래로 매달렸다.
새끼줄은 위로 던질수록 높아져서 까마득한 구름 속까지 빨려 들어가더니
잠깐 사이 마술사의 손안에 든 줄도 동이 났다.
준비가 끝나자 마술사는 아들을 불러 타이르듯 당부했다.
"아들아! 나는 늙고 기력이 쇠한 데다 몸이 무겁고 둔해서 올라갈 수가 없구나.
네가 한번 다녀와야겠다."
이어 그는 새끼줄의 끝자락을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이 줄을 잡으면 올라갈 수 있어."
아들은 새끼줄을 건네받고 난처한 기색이 역력하더니 당장 원망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참 멍청하외다!
이렇게 실처럼 가는 줄에 매달려 나보고 저 까마득한 만 길 하늘 위까지 올라가라니,
만약 중간에 줄이 끊어지기라도 하면 내 뼈는 어디서 추릴려우?"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아들을 어르며 다정한 태도로 목덜미를 두드렸다.
"내가 벌써 입놀림을 잘못하고 말았으니 후회해도 엎질러진 물이 아니냐.
수고스럽겠지만 네가 한번 다녀와야 쓰겠다.
너무 그렇게 투정 부리지 말고.
만약 복숭아를 훔쳐오면 틀림없이 엄청난 상금이 내릴 테니,
내 꼭 너에게 예쁜 마누라를 얻어주기로 약속하마."
아들은 그제야 줄을 붙잡고 빙빙 휘둘리며 위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손이 움직이면 그때마다 발도 따라 움직이는 모습은
흡사 거미가 거미줄에 매달려 움직이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차츰 구름 속으로 들어가더니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한참이 지난 뒤 하늘에서 사발만 한 복숭아 한 개가 떨어져 내렸다.
마술사는 희색이 만면해서 복숭아를 주워들고 윗전에 바쳤다.
대청 위에서는 돌려가며 한참을 관찰했지만, 그 복숭아가 과연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별안간 새끼줄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고 마술사는 기겁하며 소리쳤다.
"큰일 났다! 하늘에서 누군가 내 새끼줄을 절단했구나.
내 아들이 무엇에 기대 아래로 내려올꼬!"
한참이 지나자 또 어떤 물건이 아래로 떨어졌는데
그것이 자기 아들의 머리통임을 확인한 마술사는 통곡하며 넋두리했다.
"이는 필시 복숭아를 훔치다 과수원 지기에게 발각 난 게야.
내 아들은 이제 끝장이로구나!"
다시 한참 뒤에 다리 한 짝이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잠깐 사이에 몸뚱이의 나머지 부분이 갈가리 찢긴 채 떨어지면서
하늘에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마술사의 슬픔은 이루 형언할 길이 없었다.
그는 시체 조각들을 하나하나
궤짝에 주워 담더니 뚜껑을 잘 덮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 늙은이에게 자식이라곤 이놈 하나뿐이었습니다.
날마다 저를 따라 동서남북을 떠돌았습지요.
오늘 지엄하신 분부를 받잡다가 뜻밖에도 이런 참변을 당하고 말았군요!
이제는 지고 가서 묻어줄밖에요."
이어 그는 윗전으로 올라가 무릎을 꿇더니 애끓는 어조로 호소했다.
"한낱 복숭아 때문에 제 아들놈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만약 소인 놈을 가엾게 여기신다면 장례 비용이나 좀 보태주십쇼.
그 은혜는 죽어서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요."
자리에 앉은 관리들은 놀라고 또 기괴하게 여기다가 각자 돈을 추렴해 건네주었다.
마술사는 돈을 허리춤에 단단히 동여매더니 곧바로 궤짝을 두드리며 소리 질렀다.
"팔팔아, 얼른 나와 여러 나으리님께 감사하지 않고 무얼 꾸물대느냐?"
그러자 더벅머리 사내아이의 머리통이 궤짝의 뚜껑을 밀치며
홀연 바깥으로 나오더니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바로 죽은 줄로만 알았던 마술사의 아들이었다.
그 마술이 얼마나 신기했던지 나는 아직까지도 그 일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훗날 백련교의 무리 중에 이런 마술을 구사하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들은 정말 백련교도의 후예들이었을까?